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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보고가 - 이천보가 살았던 집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

이 가옥은 조선 영조<英祖> 때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1698∼1761)가 살았던 집이다. 이천보는 본관<本貫>이 연안<延安>이고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晋庵>이며 문인으로 이름이 높던 인물이다. 4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소탈한 성격에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이 집은 이천보가 지내던 곳이라고 하나 그 당시의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고종<高宗> 4년(1867)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안채는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사랑채와 행랑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평면을 가지며 동향하여 있다. 잘 다듬어 쌓은 장대석<長臺石>의 이벌대기단 위에 높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사다리꼴 초석<礎石>을 놓았는데 이 기단과 초석은 이천보 생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위에 세운 목조 건물은 고종 때의 것인데 비교적 치목을 정교히 하고 공간 구성도 짜임새 있게 되어 있다. 평면은 제일 왼쪽으로 하부에 궁판(문의 아랫부분에 낮게 끼워 댄 나무판)을 둔 2칸의 누마루를 두고 그 우측으로 전면에 반칸의 퇴칸을 두고 방·대청·방의 순으로 연이어지며, 제일 우측 1칸은 부엌을 두었다. 이러한 사랑채의 평면 구성은 경기 지방의 주택에서는 흔하지 않은 예라 할 수 있다. 가구 구조<袈構構造>는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지붕 전후에 2개씩의 중도리와 처마도리를 걸고 중앙에는 용마루도리를 걸고, 1개의 높은 기둥으로 후면 중도리를 받치는 지붕틀)으로 짜여 있고,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누마루 쪽은 팔작지붕이고 부엌 쪽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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