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남구 압촌동 101-1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장군의 옛 집터에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7년 건축한 것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대문 등이 남아 있다. 대문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이다. 사랑채는 정면 네칸, 측면 한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안채는 정면 여섯칸, 측면 한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데 팔작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기둥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架構>는 고주위에 대량을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그 위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반의 부엌, 두칸의 대청, 한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문(2분합문)이며, 방에는 겹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窓>이 있다. 상량<上樑>에『숭정기원후오갑정사윤이월초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글씨가 있어 건립연대가 1917년임을 알 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형제의 부조묘<不조 廟>이다. 이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위에는 첨차형의 포<包>로 결합하였고, 초익공<初翼工>위에는 용두<龍頭>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대량<大樑>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았으며, 겹처마에 조잡한 모로 단청<丹靑>을 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안채보다 빠른시기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장군의 옛 집터에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7년 건축한 것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대문 등이 남아 있다. 대문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이다. 사랑채는 정면 네칸, 측면 한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안채는 정면 여섯칸, 측면 한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데 팔작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기둥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架構>는 고주위에 대량을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그 위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반의 부엌, 두칸의 대청, 한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문(2분합문)이며, 방에는 겹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窓>이 있다. 상량<上樑>에『숭정기원후오갑정사윤이월초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글씨가 있어 건립연대가 1917년임을 알 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형제의 부조묘<不조 廟>이다. 이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벌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위에는 첨차형의 포<包>로 결합하였고, 초익공<初翼工>위에는 용두<龍頭>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대량<大樑>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았으며, 겹처마에 조잡한 모로 단청<丹靑>을 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안채보다 빠른시기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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