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48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룡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4.4m. 높이가 4m이다. 봉토 밑에는 판석<板石>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호석의 면석 사이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는데 다른 왕릉<王陵>의 십이지신상과 비교해 볼 때 조각수법이 가장 뒤지고 있다. 면석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甲石>을 올려놓았으나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장대석이 아닌 것도 있다. 호석<護石> 밖으로는 판석<板石>을 깔고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그 부재<部材>가 거의 다 없어졌다. 이외에는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와서 축대와 통로를 만들었다. 신라 제28대 진덕왕<眞德王>(재위<在位> 647∼654)은 본명이 김승만<金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 출신 왕<王>으로 재위기간에 당<唐>과 적극 외교를 펴고,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4년 3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의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추정되는데, 이 왕릉<王陵>의 위치와는 정반대이다. 왕릉 형식 또한 성덕왕대<聖德王代> 이후에 유행한 발달된 형식이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新羅 王陵>의 십이지신상 중에서도 가장 늦은 것이어서, 그 위치와 함께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릉<陵>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룡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4.4m. 높이가 4m이다. 봉토 밑에는 판석<板石>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호석의 면석 사이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는데 다른 왕릉<王陵>의 십이지신상과 비교해 볼 때 조각수법이 가장 뒤지고 있다. 면석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甲石>을 올려놓았으나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장대석이 아닌 것도 있다. 호석<護石> 밖으로는 판석<板石>을 깔고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그 부재<部材>가 거의 다 없어졌다. 이외에는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와서 축대와 통로를 만들었다. 신라 제28대 진덕왕<眞德王>(재위<在位> 647∼654)은 본명이 김승만<金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 출신 왕<王>으로 재위기간에 당<唐>과 적극 외교를 펴고,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4년 3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의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추정되는데, 이 왕릉<王陵>의 위치와는 정반대이다. 왕릉 형식 또한 성덕왕대<聖德王代> 이후에 유행한 발달된 형식이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新羅 王陵>의 십이지신상 중에서도 가장 늦은 것이어서, 그 위치와 함께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릉<陵>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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