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용문면 덕촌1∼2리 산 4-2
운계서원<雲溪書院>은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인 조욱<趙昱>(1498∼1557)선생의 덕업을 기리고자 그의 제자들이 효종<孝宗> 5년(1654)에 건립한 서원이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수차례의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욱 선생은 19세 때 생진양과<生進兩科>에 급제하여 순릉<順陵>, 영릉<英陵> 등의 참봉<參奉>(조선시대 각 관청의 종9품 벼슬)을 지냈으며,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면서 많은 후학을 가르쳐 용문 선생<龍門先生>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한다. 건물은 재실<齋室> 1채와 사당<祠堂>만 남아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외벌대의 막돌쌓기로 되어 있고 기둥은 원형의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측면 2칸 중 후측 칸은 방화벽을 두었고 각 칸은 모두 띠살문(세살문)을 달아 놓았다. 기둥 머리는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고 촛가지의 형태가 기둥마다 달라 수차례의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곳 사당에는 조욱 선생 외에 다섯 분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운계서원<雲溪書院>은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인 조욱<趙昱>(1498∼1557)선생의 덕업을 기리고자 그의 제자들이 효종<孝宗> 5년(1654)에 건립한 서원이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수차례의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욱 선생은 19세 때 생진양과<生進兩科>에 급제하여 순릉<順陵>, 영릉<英陵> 등의 참봉<參奉>(조선시대 각 관청의 종9품 벼슬)을 지냈으며,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면서 많은 후학을 가르쳐 용문 선생<龍門先生>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한다. 건물은 재실<齋室> 1채와 사당<祠堂>만 남아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외벌대의 막돌쌓기로 되어 있고 기둥은 원형의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측면 2칸 중 후측 칸은 방화벽을 두었고 각 칸은 모두 띠살문(세살문)을 달아 놓았다. 기둥 머리는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고 촛가지의 형태가 기둥마다 달라 수차례의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곳 사당에는 조욱 선생 외에 다섯 분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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