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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 - 쌍탑가람제에 의한 최초의 사찰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

사천왕사지는 조선시대 사서인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신라 사람들이 존중을 아끼지 않았던 신유림(神遊林)에 건립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특히 신유림의 유래는 신라 제18대 실성왕 12년(413)에 낭산에서 일어난 상서로운 구름을 보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선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복지라 말하였다 한다. 이후에는 이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였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11년(671년)에 시작하여 19년(679)에 완성하였다.
당나라는 674년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군사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50만대병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신라는 불력으로 그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
그 뒤 5년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때까지 문두루비법을 행하던 단석이 남아 있었다 하나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이 절을 지은 곳 즉 신유림은 '칠처가람기허'의 하나로서 선덕여왕이 이곳을 도리천이 있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던 곳이다.

사천왕이 거주하는 사왕천은 불교세계에서 사바세계의 중심지로 보고있는 수미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 꼭대기에 도리천을 두고 있는데,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의 설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서라벌의 가운데 산인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하려했던 신라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통일전의 신라사찰들은 모두 금당앞에 1기의 3층 또는 5층석탑을 세우는 1탑1금당식의 사찰조영방식을 따르다가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ㆍ서 양면에 쌍탑을 세우는 쌍탑가람제로 변모하는데, 이 절은 통일 이후에 발전하는 쌍탑가람제에 의한 최초의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가람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남면 앞쪽으로 동탑과 서탑이 있고, 북방으로는 좌경루와 우경루가 있어서 마치 본존불이 안치된 금당을 중심으로 사천왕이 배치된 것과 같은 특이한 형태를 이루었다.

1922년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우수한 당초문의 와당과 사천왕부조의 일부분이 출토되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없다. 이것은 선덕여왕때 사적을 남겼다고 전하는 양지스님의 걸작품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수많은 그의 작품중에서도 사천왕사의 천왕상ㆍ팔부증상은 대표작으로 전해 오지만 지금은 허리부분이 잘린 천왕상만 전해져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사찬왕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명랑과 양지와 월명사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살던 사천왕사 앞동네를 월명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곳 사지는 초석 등 기본구조는 원위치에 남아있는 편이나 일제시대에 금당지왕 강당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철로가 개설됨으로 하여 사지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말았다. 국방사찰이라 할 수 있는 사천왕사와 절이 위치한 낭산의 지맥을 갈라 놓은 것이다.
또한 사지 앞으로 나있는 도로로 인해 유적보존에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
동서 약 110m의 사역내에는 당간지주ㆍ석조귀부ㆍ동서목탑지ㆍ금당지ㆍ좌우경루 및 초석등이 유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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