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강서구 천성동 1613
쓰시마섬< 對馬島 >에서 부산< 釜山 >·진해< 鎭海 > 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 要衝 >에 있어서 예로부터 왜구< 倭寇 >가 침입하는 길목이었다.
조선< 朝鮮 > 중종< 中宗 > 5년(1510) 삼포왜란< 三浦倭亂 > 이후 이곳에 진영< 鎭營 >을 베풀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게 되었고,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 蛇梁鎭倭變 >이 일어나자 방어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었다.
이때 바다쪽으로 돌덩이를 채워서 병선< 兵船 >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진보< 鎭堡 >를 축조하여 수군< 水軍 >이 주둔< 駐屯 >하게 하였다.
이웃한 가덕진< 加德鎭 > 소속으로, 함께 왜구침입을 막는 곳이었으나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왜군< 倭軍 >에게 함락당하였다가 후에 복구되었다.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 진보< 鎭堡 > 축성양식< 築城樣式 >을 보여주는 성벽은 둘레 약 960m이고 폭 4.5m, 높이 3.5m쯤이다. 서·남·북쪽에는 옹성< 甕城 >을 갖춘 문이 있고 동쪽에는 문은 없이 성벽을 이중으로 돌렸다.
또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꼴의 치성< 雉城 >을 두어 방어력< 防禦力 >을 높이었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 垓字 >를 둘렀던 흔적이 있어서 축성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쓰시마섬< 對馬島 >에서 부산< 釜山 >·진해< 鎭海 > 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 要衝 >에 있어서 예로부터 왜구< 倭寇 >가 침입하는 길목이었다.
조선< 朝鮮 > 중종< 中宗 > 5년(1510) 삼포왜란< 三浦倭亂 > 이후 이곳에 진영< 鎭營 >을 베풀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게 되었고, 중종 39년(1544) 사량진왜변< 蛇梁鎭倭變 >이 일어나자 방어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었다.
이때 바다쪽으로 돌덩이를 채워서 병선< 兵船 >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진보< 鎭堡 >를 축조하여 수군< 水軍 >이 주둔< 駐屯 >하게 하였다.
이웃한 가덕진< 加德鎭 > 소속으로, 함께 왜구침입을 막는 곳이었으나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왜군< 倭軍 >에게 함락당하였다가 후에 복구되었다.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 진보< 鎭堡 > 축성양식< 築城樣式 >을 보여주는 성벽은 둘레 약 960m이고 폭 4.5m, 높이 3.5m쯤이다. 서·남·북쪽에는 옹성< 甕城 >을 갖춘 문이 있고 동쪽에는 문은 없이 성벽을 이중으로 돌렸다.
또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꼴의 치성< 雉城 >을 두어 방어력< 防禦力 >을 높이었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 垓字 >를 둘렀던 흔적이 있어서 축성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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