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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왜성 - 왜적이 김해와 양산간 연락을 취하기 위해 쌓은 성

by 넥스루비 2007. 8. 7.
부산 북구 덕천동 산72-1

임진왜란때 이곳을 점유한 왜장(倭將)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와 다찌바나(立花宗茂)들이 김해의 죽도성(竹島城, 金海城)의 지성(支城)으로 김해와 양산사이의 연락을 취하기 위한 요충지로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의 지맥(支脈)이 끝나는 자리로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기고 그 밑으로 배가 정박할 수 있었으며 김해 죽도성을 바라볼 수 있는 그들 나름의 요지였다.
1593년에 쌓여져 의성(義城) 또는 감동포성(甘同浦城)이라고도 하며 구법곡(仇法谷)의 진(陳)이라고도 한다.
성의 면적은 5,940㎡로 위쪽 부분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누각터 1개소와 성벽 얼마간도 남아있다.
성벽의 높이는 최저 8m에서 최고 10m인데 위치나 축성방식(築城方式)이 첫눈으로 보아 일본식성(日本式城)임을 알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울산의 서생포(西生浦)부터 시작하여 동래와 김해, 거제도, 웅천(熊川) 등 지방에 이르는 지역의 요지(要地)마다에 무려 16둔(屯)으로 산과 바다를 의거(依據)하여 성을 쌓고 참호(塹壕)를 파서 견고한 거점(據点)을 확보하고 좀처럼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철수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에 쌓아진 성의 하나가 덕천동에 위치한 구포왜성이다.
이들의 성은 즉, 서생포성(西生浦城)과 단성(端城), 임랑포성(林浪浦城), 기장성(機張城), 동래성(東萊城), 부산성(釜山城), 단성(端城), 안골포성(安骨浦城), 웅천성(雄川城)과 단성(端城), 영등포성(永登浦城), 장문포성(長門浦城 - 巨濟長木) 외 합계 18개성을 말한다.

구포왜성은 일명 의성(義城)으로 불리워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의성이라고 부르게 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왜군이 철수할 무렵 우리 의병들이 이 성을 점거하여 의성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구포왜성은 금정산의 일맥이 덕천동으로 서류(西流)하여 낙동강에서 끝나는 표고 약 60m의 동산 위에 축조되었는데 성밑에는 배를 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지점은 지리적으로 전략상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성이 비록 왜군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역(使役)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땀과 눈물어린 노고가 어려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을 길이 보존하여 이 나라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승용차]
덕천 로타리에서 화명동 쪽으로가다가 구룡사를 지나 우회전하여 내려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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