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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연당 - 국담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공의로 만든 연못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조선후기의 연당
일명 기양서원(沂陽書院)이라고도 하는데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 감은재(感恩齋), 주도복(周道復) 부자(父子)와 관련된 유적지이다.
영조(英祖) 4년(1728) 이인좌(李麟左)가 반란을 일으켜 호남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을 때 이에 분연히 맞서 함안일대의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倡義)의 깃발을 든 국담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공의(公義)로 만든 연못이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고 관군들이 원대복귀하는 길에 주씨(周氏) 향리에 모여 마을어귀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서당앞 넓은 마당에 연당을 파고 당주(塘洲)를 만들어 이름은 국담(菊潭)이라 부르고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다.
또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그 문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으니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이었다.
이후로 주재성은 호를 국담이라 부르면서 서당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한다.

연당은 주재성 생가 일곽에 조성되어서 오래된 정침(正寢) 한 채가 연당 서북쪽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일자형 평면으로 1칸반의 전퇴(前退)가 있는 홑집인데 정면이 5칸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후세들의 편리에 의한 개수등으로 학술적 가치는 상실하고 말았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국담의 연당은 인근의 산석(山石)으로 호안을 2층으로 쌓아 석축의 높이를 완화시켰고 중앙에 당주 하나를 모아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았다.

연당의 지반(地畔)에 정과 누를 세웠고 최근에는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였다.
아환정(阿煥亭)은 북편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연당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다. 홑처마 팔작지붕.
북동쪽 연당 한켠에 있는 풍욕루(風浴樓)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 뒤 퇴가 있는 3칸으로 구조되었으며 역시 홑처마 팔작지붕인데 이것들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이다.

이 연당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후기 연못의 실례로서 한국정원 문화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주재성(周宰成, 1681~1743)

조선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주세붕의 후손 각(珏)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근사록」과 「주자대전」을 탐독하고 「위학입교도(爲學立敎圖)」와 「오륜론(五倫論)」을 지어 실천에 힘썼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左), 정희량(鄭希亮)의 난때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하여 관찰사 황선(黃璿)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다.
또한 그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하여 가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어 놓았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훈고(訓 )에 전념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죽은지 3년뒤인 1745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추증되었으며, 1783년(정조7) 영남유생의 상소로 정려(旌閭)되고 이어 1788년 기양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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