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산구 비아동 689-3
취병선생 유허비는 광산구 비아동에 위치한 작은 공원내에 있다. 碑의 형식은 화강석 1매에 碑의 지붕과 몸체(碑身)를 함께 조성하였고 기단은 별개의 돌이다.특징은 높이 보다 너비가 긴 가로형태의 양식인 점이다. 즉 비의 총 높이95cm,너비 120cm,두게 28cm이며 文記는 모두 346字로 陰刻文이다.
趙珩(1606∼1679년)은 조선시데 顯宗때의 문신으로 字는 君獻, 號는 忠貞이며 本貫은 豊壞이다. 1630년(인조8년) 明經科에 급제하여 史局에 재임할 때 許穆의 사건에 관련되어 扶餘에 귀양갔다.
1655년 대사간 겸 通信上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병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대사헌을 역임 하였으나 1675년 장열대비의 복제 문제로 인하여 경기도 楊洲에 추방 되었다. 현재 하남의 안청동에는 풍양조씨는 살고 있지 않으며 조형 선생의 후손은 없고 경기도 친인척이 있다고 하지만 유허비는 방치되어 왔다.
광주 출신으로서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인물도 흔치 않고 또한 광주시 일원에는 학술적 가치를 가진비는 더욱 없으므로 이 비는 취병선생에 대한 연구와 地方史 硏究, 金石學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취병선생 유허비는 광산구 비아동에 위치한 작은 공원내에 있다. 碑의 형식은 화강석 1매에 碑의 지붕과 몸체(碑身)를 함께 조성하였고 기단은 별개의 돌이다.특징은 높이 보다 너비가 긴 가로형태의 양식인 점이다. 즉 비의 총 높이95cm,너비 120cm,두게 28cm이며 文記는 모두 346字로 陰刻文이다.
趙珩(1606∼1679년)은 조선시데 顯宗때의 문신으로 字는 君獻, 號는 忠貞이며 本貫은 豊壞이다. 1630년(인조8년) 明經科에 급제하여 史局에 재임할 때 許穆의 사건에 관련되어 扶餘에 귀양갔다.
1655년 대사간 겸 通信上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병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대사헌을 역임 하였으나 1675년 장열대비의 복제 문제로 인하여 경기도 楊洲에 추방 되었다. 현재 하남의 안청동에는 풍양조씨는 살고 있지 않으며 조형 선생의 후손은 없고 경기도 친인척이 있다고 하지만 유허비는 방치되어 왔다.
광주 출신으로서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인물도 흔치 않고 또한 광주시 일원에는 학술적 가치를 가진비는 더욱 없으므로 이 비는 취병선생에 대한 연구와 地方史 硏究, 金石學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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