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산구 소촌동 산 85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년)은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충주이며 눌재 박상(訥齋朴祥)의 조카이다. 명종 8 년(155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한 뒤 예문관 전적(藝文館 典籍)을 시작으로 선조12 년 (1579)영의정을 거쳐 선조 20 년 (1587) 까지 35년간 조정에 있었다. 그는 1565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대사헌(大司憲)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척신들의 횡포를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암 문집은 7권 3책의 목판본으로 初刊은 인조 26년 (1648) 자손들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철종 8년(1857)에 중간 되었다. 권1∼3에 詩 583 수,권4에 啓 2편, 書 2편, 雜著 4편, 碑銘 7편, 권5∼7은 부록으로 행장(行狀),시장(諡狀),신도비명(神道碑銘),축문(祝文),소(疎),제문(祭文),찬(贊), 묘문(墓文),서후(書後),발(跋),시(詩),만사(輓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 가운데「논윤원형계」(論尹元衡啓)는 윤원형 거세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답이이율곡서」(答李珥栗谷書)는 율곡 이이와 이기론(理氣論)을 논의한 것이고, 「퇴계선생묘지명」(退溪先生墓地銘)은 퇴계 이황의 일대기를 적은것 이다.
이외에 「국조보감」(國朝寶鑑),「홍재전서」(弘齋全書),「조야기문」(朝野奇問)과 제가(諸家)의 서간문, 상소문 등에서 저자에 관한 사항을 모은 「제가기록」(諸家記錄)등이 있다.
임 목판각의 원집(原集)은 2 권으로 17세기 초 완산도판(完山道判) 서필원(徐必遠 1614∼1671년)에 의해 전주에서 판각 되었으나 가화(家禍)로 판본이 훼손되고 전하지 않아 눌재집(訥齋集)을 중간(重刊)하고나서 사암의 유집(遺集)과 고시(古時)를 수집하여 원집과 함께 판각하였다. 그후 1850년 홍직필(洪直弼)이 여기에 발문을 썼다. 크기는 가로 35cm,세로22cm,두께 4cm이며 모두 180매이다.
이 목판각은 오랫동안 조정에 있었던 그의 경륜을 정리한 것으로 그의 경륜을 정리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자료이다.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년)은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충주이며 눌재 박상(訥齋朴祥)의 조카이다. 명종 8 년(155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한 뒤 예문관 전적(藝文館 典籍)을 시작으로 선조12 년 (1579)영의정을 거쳐 선조 20 년 (1587) 까지 35년간 조정에 있었다. 그는 1565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대사헌(大司憲)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척신들의 횡포를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암 문집은 7권 3책의 목판본으로 初刊은 인조 26년 (1648) 자손들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철종 8년(1857)에 중간 되었다. 권1∼3에 詩 583 수,권4에 啓 2편, 書 2편, 雜著 4편, 碑銘 7편, 권5∼7은 부록으로 행장(行狀),시장(諡狀),신도비명(神道碑銘),축문(祝文),소(疎),제문(祭文),찬(贊), 묘문(墓文),서후(書後),발(跋),시(詩),만사(輓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 가운데「논윤원형계」(論尹元衡啓)는 윤원형 거세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답이이율곡서」(答李珥栗谷書)는 율곡 이이와 이기론(理氣論)을 논의한 것이고, 「퇴계선생묘지명」(退溪先生墓地銘)은 퇴계 이황의 일대기를 적은것 이다.
이외에 「국조보감」(國朝寶鑑),「홍재전서」(弘齋全書),「조야기문」(朝野奇問)과 제가(諸家)의 서간문, 상소문 등에서 저자에 관한 사항을 모은 「제가기록」(諸家記錄)등이 있다.
임 목판각의 원집(原集)은 2 권으로 17세기 초 완산도판(完山道判) 서필원(徐必遠 1614∼1671년)에 의해 전주에서 판각 되었으나 가화(家禍)로 판본이 훼손되고 전하지 않아 눌재집(訥齋集)을 중간(重刊)하고나서 사암의 유집(遺集)과 고시(古時)를 수집하여 원집과 함께 판각하였다. 그후 1850년 홍직필(洪直弼)이 여기에 발문을 썼다. 크기는 가로 35cm,세로22cm,두께 4cm이며 모두 180매이다.
이 목판각은 오랫동안 조정에 있었던 그의 경륜을 정리한 것으로 그의 경륜을 정리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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