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산구 소촌동 산85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5∼1530년)의 본관은 충주로 연산군 7년(1501)정시을과(庭試乙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 正字)를 시작으로 중종24년(1529) 나주 목사를 마치기 까지 29년간 조정에 있었다. 그는 미정을 바르게 다스렸으며, 도학(道學)의 의리 실천 정신을사회화 하는데 힘썼다. 이는 우부리(牛夫里: 연산군이 총애한 여자의아버지) 장살(杖殺)사건,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사건 동국사략(東國史略)의 저술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한편으로 미움을 받았으나, 동료 사림(士林 )들로 부터는 인정을 받아 사유 간택(師儒 揀擇)의 후보자로 추천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화는 면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의리 실천 정신은 기묘 명현(名賢)들과 뜻을 함께하여 퇴계선생도 그를 기묘종인(己卯宗人) 이라며 존중하였다. 눌재의 유고(遺稿)는 詩,賦,序, 記,跋, 祭文으로 나누어지며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면보다 내면적 여과를 거친 차분하고 완곡한 서정ㅇ르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목판각은 원집(原集)7권,속집(續集)5권으로 모두 12권이다. 초간은 명종 2년 (1547)에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이 금산 수령으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중간(重刊)은 1634년 문곡 김수항(문곡김수항 1651∼1708년)이 원집에 빠진 것을 정리하여 호남방백 이사명(李師命)과 이유공(李濡公) 에게 부탁하여 광산에서 판각하도록 하였다. 판각 작업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일시 중단 되었다가 다시 방백 최규서(최규서 1650∼1734년)가 서둘러 완성 하였다. 1781년 판본이 망가져 보기 어렵게 되자 어명으로 도백(道伯) 서정언(徐鼎彦)과 의논하여 중간하도록 하였으며, 이 판본은 광주 향교 명륜당에 수장되었다. 그후 1841년에 화재로 유실된 것을 광주 목사 조철영(趙撤永)이 중각(重刻)하면서 빠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모두 18편이 되었다.현존 목판각은 1판 2면의 양면판으로 1판에 4 면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34cm,세로20cm, 두께4cm내외로 일정하지 않다.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5∼1530년)의 본관은 충주로 연산군 7년(1501)정시을과(庭試乙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校書館 正字)를 시작으로 중종24년(1529) 나주 목사를 마치기 까지 29년간 조정에 있었다. 그는 미정을 바르게 다스렸으며, 도학(道學)의 의리 실천 정신을사회화 하는데 힘썼다. 이는 우부리(牛夫里: 연산군이 총애한 여자의아버지) 장살(杖殺)사건,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사건 동국사략(東國史略)의 저술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한편으로 미움을 받았으나, 동료 사림(士林 )들로 부터는 인정을 받아 사유 간택(師儒 揀擇)의 후보자로 추천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화는 면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의리 실천 정신은 기묘 명현(名賢)들과 뜻을 함께하여 퇴계선생도 그를 기묘종인(己卯宗人) 이라며 존중하였다. 눌재의 유고(遺稿)는 詩,賦,序, 記,跋, 祭文으로 나누어지며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면보다 내면적 여과를 거친 차분하고 완곡한 서정ㅇ르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목판각은 원집(原集)7권,속집(續集)5권으로 모두 12권이다. 초간은 명종 2년 (1547)에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이 금산 수령으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중간(重刊)은 1634년 문곡 김수항(문곡김수항 1651∼1708년)이 원집에 빠진 것을 정리하여 호남방백 이사명(李師命)과 이유공(李濡公) 에게 부탁하여 광산에서 판각하도록 하였다. 판각 작업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일시 중단 되었다가 다시 방백 최규서(최규서 1650∼1734년)가 서둘러 완성 하였다. 1781년 판본이 망가져 보기 어렵게 되자 어명으로 도백(道伯) 서정언(徐鼎彦)과 의논하여 중간하도록 하였으며, 이 판본은 광주 향교 명륜당에 수장되었다. 그후 1841년에 화재로 유실된 것을 광주 목사 조철영(趙撤永)이 중각(重刻)하면서 빠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모두 18편이 되었다.현존 목판각은 1판 2면의 양면판으로 1판에 4 면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34cm,세로20cm, 두께4cm내외로 일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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