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서삼릉(西三陵)은 중종(中宗) 제1계비(第1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 인종(仁宗)과 동비(同妃)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孝陵), 철종(哲宗)과 동비(同妃) 철인장왕후(哲仁章王后)의 예릉(睿陵)인 3릉(陵)을 합칭(合稱)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고 한다.
먼저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의 능이다.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중종 10년(1515) 2월 25일 탄생하였고, 3월 2일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였다. 중종15년 세자로 책봉되고 동 39년 즉위하였으나 불과 재위 8개월만에 31세로 승하하였다. 인품이 어질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생전에 복성군(福城君)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고 임종시에 부왕의 상(喪)을 마치지 못함을 송구히 여겨 부모의 능 [정릉 (靖陵)]에 묻히기를 유언하였다. 인성왕후는 나주 박씨 금성부원군 박용 의 딸로 중종 19년(1524) 11세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되었다. 선조 10년(1577) 64세로 승하하였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으로 연결한 쌍릉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려쳐 당시 산릉경영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 10년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당초 산릉석물을 다시 고쳐 넣었다. 당시는 인종의 외가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가 소윤(小尹) 사이에 알력이 켰던 시절이니만큼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명종(明宗)측에서 상례(喪禮) 절차르 줄이며 능 만드는 일에 소홀히 하는등 정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 효릉의 병석문(屛石門)이 매우 조략(粗略)한 것이 여기에 연유한 것 같다.
다음으로 희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章敬王后)의 능이다. 왕후는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중종 원년 대내(大內) 에 들어와 숙의(淑儀)가 되고 신비(愼妃)가 쫓져난 뒤 왕비로 봉해졌고 중종 10년(1515) 인종을 낳은 뒤 산후가 좋지 않아 25세로 승하하였다. 왕비가 돌아가자 처음에는 능을 경기도 광주 헌릉(獻陵) 안에 정하였으나 20여년 뒤인 중종 32년 희릉 광저(禧陵壙低)에 큰 돌이 깔린 채 그대로 공사를 마쳤다는 설을 들어 능을 옮기자는 설을 의논하였으나 왕이 움직이지 않자 풍수설에 큰 돌이 광저에 깔리면 불길하다고 아뢰서 드디어 왕의 뜻을 움직이게 되었다. 이 일은 김안로 등이 정광필 남곤등에게 중죄를 주려고 이용한 것으로 총호사(摠護使)였던 정광필 이하 지관(地官) 및 공사에 관계했던 관리들이 대역죄에 연좌되었고 그들의 고신(告身)이 발탈 또는 추탈(追奪)되어 나아가서 그들의 자손들까지 금고되는 옥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옮기게 된 것이다. 그 8년 뒤 중종의 정릉이 희릉에 정해지며 정자각을 양릉 중간에 옮기고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을 취해 왕의 능호(陵號)를 쓰더니 명종 17년 문정왕후가 왕릉을 선릉(宣陵) 곁에 옮기게 되자 다시 희릉으로 칭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哲宗)과 철인왕후(哲人王后) 안동 김씨의 능이다. 철종은 은언군(恩彦君)의 손(孫)이요 전계군(全溪君)의 둘째 아들로 강화도(江華島)에 살던중 후사없이 돌아간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이다. 헌종의 섭정을 하던 대왕대비의 수렴을 받게 되었다. 비록 왕 2년에 대왕대비의 수렴이 걷히기는 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 속에서 실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못한 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발생과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동요가자주 일어났고 전염병이 퍼지는 등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가운데 재위 14년 만에 승하하였다. 왕비 철인왕후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문근의 딸로 철종 2년 왕비로 책봉되고 고종 15년 42세에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능의 모습을 보면 양릉(兩陵)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의 모습을 취하고있으며 능석물(陵石物)양식상 윤건릉의 영향이 보이고 있다. 즉 융릉(隆陵)에서 팔각장명등과 숙종 영조 년간의 사각장명등의 운족(雲足)양식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이 만들어 지고 있는데 그것을 채용하고 있다. 능 앞 3계는 이미 2계(階)가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前方)으로 나와 있음이 특이하다.
서삼릉(西三陵)은 중종(中宗) 제1계비(第1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 인종(仁宗)과 동비(同妃)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孝陵), 철종(哲宗)과 동비(同妃) 철인장왕후(哲仁章王后)의 예릉(睿陵)인 3릉(陵)을 합칭(合稱)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고 한다.
먼저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의 능이다.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중종 10년(1515) 2월 25일 탄생하였고, 3월 2일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였다. 중종15년 세자로 책봉되고 동 39년 즉위하였으나 불과 재위 8개월만에 31세로 승하하였다. 인품이 어질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생전에 복성군(福城君)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고 임종시에 부왕의 상(喪)을 마치지 못함을 송구히 여겨 부모의 능 [정릉 (靖陵)]에 묻히기를 유언하였다. 인성왕후는 나주 박씨 금성부원군 박용 의 딸로 중종 19년(1524) 11세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되었다. 선조 10년(1577) 64세로 승하하였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으로 연결한 쌍릉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려쳐 당시 산릉경영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 10년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당초 산릉석물을 다시 고쳐 넣었다. 당시는 인종의 외가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가 소윤(小尹) 사이에 알력이 켰던 시절이니만큼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명종(明宗)측에서 상례(喪禮) 절차르 줄이며 능 만드는 일에 소홀히 하는등 정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 효릉의 병석문(屛石門)이 매우 조략(粗略)한 것이 여기에 연유한 것 같다.
다음으로 희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章敬王后)의 능이다. 왕후는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중종 원년 대내(大內) 에 들어와 숙의(淑儀)가 되고 신비(愼妃)가 쫓져난 뒤 왕비로 봉해졌고 중종 10년(1515) 인종을 낳은 뒤 산후가 좋지 않아 25세로 승하하였다. 왕비가 돌아가자 처음에는 능을 경기도 광주 헌릉(獻陵) 안에 정하였으나 20여년 뒤인 중종 32년 희릉 광저(禧陵壙低)에 큰 돌이 깔린 채 그대로 공사를 마쳤다는 설을 들어 능을 옮기자는 설을 의논하였으나 왕이 움직이지 않자 풍수설에 큰 돌이 광저에 깔리면 불길하다고 아뢰서 드디어 왕의 뜻을 움직이게 되었다. 이 일은 김안로 등이 정광필 남곤등에게 중죄를 주려고 이용한 것으로 총호사(摠護使)였던 정광필 이하 지관(地官) 및 공사에 관계했던 관리들이 대역죄에 연좌되었고 그들의 고신(告身)이 발탈 또는 추탈(追奪)되어 나아가서 그들의 자손들까지 금고되는 옥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옮기게 된 것이다. 그 8년 뒤 중종의 정릉이 희릉에 정해지며 정자각을 양릉 중간에 옮기고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을 취해 왕의 능호(陵號)를 쓰더니 명종 17년 문정왕후가 왕릉을 선릉(宣陵) 곁에 옮기게 되자 다시 희릉으로 칭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哲宗)과 철인왕후(哲人王后) 안동 김씨의 능이다. 철종은 은언군(恩彦君)의 손(孫)이요 전계군(全溪君)의 둘째 아들로 강화도(江華島)에 살던중 후사없이 돌아간 헌종(憲宗)의 뒤를 이어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이다. 헌종의 섭정을 하던 대왕대비의 수렴을 받게 되었다. 비록 왕 2년에 대왕대비의 수렴이 걷히기는 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 속에서 실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못한 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발생과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동요가자주 일어났고 전염병이 퍼지는 등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가운데 재위 14년 만에 승하하였다. 왕비 철인왕후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문근의 딸로 철종 2년 왕비로 책봉되고 고종 15년 42세에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능의 모습을 보면 양릉(兩陵)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의 모습을 취하고있으며 능석물(陵石物)양식상 윤건릉의 영향이 보이고 있다. 즉 융릉(隆陵)에서 팔각장명등과 숙종 영조 년간의 사각장명등의 운족(雲足)양식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이 만들어 지고 있는데 그것을 채용하고 있다. 능 앞 3계는 이미 2계(階)가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前方)으로 나와 있음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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