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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원종공신록권 - 현존하는 목활자본이란 점에서 우리나라 활자인쇄사상 중요한...

by 넥스루비 2007. 8. 7.
부산 서구 동대신동3가 동아대학교구덕캠퍼스

이 녹권< 錄券 >은 홍무< 洪武 > 30년, 곧 조선< 朝鮮 > 태조< 太祖 > 3년(1397) 10월에 공신도감< 功臣都監 >에서 개국원종공신< 開國原從功臣 > 사재부령< 司宰副令 > 심지백< 沈之伯 >에게 내린 것이다.
심지백< 沈之伯 >은 홍무< 洪武 > 28년 11월에 전 황주< 黃州 > 목사< 牧使 > 최계용< 崔系溶 > 등 수십 명과 더불어 원종공신< 原從功臣 >에 열< 列 >하였으며, 홍무< 洪武 > 30년 9월 11일에 왕지< 王旨 >에 의하여 이 녹권< 錄券 >을 사급< 賜給 >하여, 대장군< 大將軍 > 이화영< 李和英 >의 예< 例 >에 따라서 포상< 褒賞 >의 전< 典 >을 사< 賜 >한 것이다.
이 사실은 실록< 實錄 >에도 누락되어 소전< 所傳 >이 없으나, 이 녹권< 錄券 >에 의하여 비로소 알려졌다.
심지백< 沈之伯 >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확실치 않으나, 아마 함경도< 咸鏡道 > 사람으로 일찍이 이성계< 李成桂 >를 따라 공을 세웠던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 녹권< 錄券 >에 심지백< 沈之伯 >의 본관< 本貫 >을 청송< 靑松 >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후에 개찬< 改竄 >한 자취가 보인다. 이것은 조선< 朝鮮 > 초기의 고문서< 古文書 >로서 이두문< 吏讀文 >이 많이 사용되어 그 문제와 내용이 귀중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목활자< 木活字 >를 사용하여 인출< 印出 >해 낸 점에 있다.
조선< 朝鮮 > 태조< 太祖 >가 새로운 왕조< 王朝 >를 수립하자 관제를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고려< 高麗 >의 구제< 舊制 >를 답습하였다.
따라서 경적인출< 經籍印出 >의 일을 관장하는 관아< 官衙 >의 직제에 있어서도 여말< 麗末 > 서적원< 書籍院 >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주자인쇄< 鑄字印刷 >의 업무를 관장하는 영< 令 >과 승< 丞 >의 직도 그대로 두게 하였다.
그러나 신왕조< 新王朝 >의 기반이 아직 잡히지 않아 태종< 太宗 > 3년(1403)에 계미동활자< 癸未銅活字 >를 주조해 내기까지에는 목활자< 木活字 >와 목판< 木板 >으로 긴요한 것을 우선 찍어서 수요를 충당하였던 것이다.
초기의 목활자본< 木活字本 >으로서는 태조< 太祖 > 4년(1395)에 서적원< 書籍院 >에서 백주지사< 白州知事 > 서찬< 徐贊 >이 만든 목활자< 木活字 >로 인출반행< 印出頒行 >한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 >』 100여 권이 있으나 실물이 전하지 않고, 태조< 太祖 > 6년(1397)에 인출반사< 印出頒賜 >한 이 녹권< 錄券 >만이 겨우 하나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자체< 字體 >가 균정< 均整 >하지 못하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배자< 排字 >가 고르지 못하고, 도각< 刀刻 >도 조촐한 편으로 목리< 木理 >가 보이나, 연대적으로 가장 오랜 목활자본< 木活字本 > 실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韓國 > 활자사상< 活字史上 > 매우 귀중한 인쇄자료< 印刷資料 >가 된다.
주자인쇄술< 鑄字印刷術 >이 발달된 이후의 조선< 朝鮮 > 공신록권< 功臣錄券 >은 활인방책< 活印方冊 >으로 만드는 것이 상례이나, 이것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한 조선< 朝鮮 > 초기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대중교통]
지하철 동대신동역에 하차 후 동아대구덕캠퍼스까지 도보로 약 10분소요.
버스로는 68,168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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