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금곡동 209-13
원효사 대웅전 왼쪽 150m 떨어진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의 형식은 입각원당식인데 지치석과 하대석은 방형이다.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각 면마다 종회의 복-을 이접씩 새겼고 네모서리는 사자를 조각하였으며, 하대석 위의 중대석은 발각면으로 사면에는 만개한 연꽃을, 다른 사면에는 --룡과 ---자를 조각하였다.
중대석 위의 상대석은 --팔접의 --을 겹으로 돌리고 평범한 상면에 탑신을 세웠으며 탑신 은 역시 팔각석규형인데 너비보다 높이가 길다. 탑신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다만 전면에 당호를 새겼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옥개석은 탑신에 비해 정교하고 섬세한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탑신과는 대조적이다.
락수면에는 기왓골과 합객머리의 우동이 정연하고, 우동의 끝에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과 같은 서수들을 새겨서 막새기와를 대신한 점은 특이할 뿐 아니라 미감을 더하고 옥개 밑의 연목(서까래) 표현과 과장없는 추녀의 곡선은 아름답다. 그러나 상륜부가 유실되어 완형은 볼 수 없다.
원효사는 조선사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서석산지북 유원-- 신라국사원효 애기산명수려 축-이거잉이기명지.."라 하여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믿을 수 없다. 고려의 충-왕대 (1314~1339년)에 -암종의 명승(명 : 부상)이 중창했다고 하며, 정주재란 때 불탄 것을 1609년 비 -경이 기와를 손수 구어 중창하고, 천왕문도 세웠다.
1636년 신원대사가 중수한데 이어 1637년 옥견대비가 석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02년에 회운대비가 대웅전을 복원했으며, 1847년 내원대비가 칠성전을 신축했고, 1930년 지웅현금정명월이 칠성각, 십왕전을 중수했는데 6.25 동란으로 전멸되는 비운을 맞았다.
1954년 가지 전린속과 지웅현, 지창선등이 대웅전을 우선 중창했는데, 1980년 가지 신법타가 대웅전을 해체복원하는 한편 --와 종무실 등을 신축, 사이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원효사 대웅전 왼쪽 150m 떨어진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의 형식은 입각원당식인데 지치석과 하대석은 방형이다.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각 면마다 종회의 복-을 이접씩 새겼고 네모서리는 사자를 조각하였으며, 하대석 위의 중대석은 발각면으로 사면에는 만개한 연꽃을, 다른 사면에는 --룡과 ---자를 조각하였다.
중대석 위의 상대석은 --팔접의 --을 겹으로 돌리고 평범한 상면에 탑신을 세웠으며 탑신 은 역시 팔각석규형인데 너비보다 높이가 길다. 탑신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다만 전면에 당호를 새겼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옥개석은 탑신에 비해 정교하고 섬세한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탑신과는 대조적이다.
락수면에는 기왓골과 합객머리의 우동이 정연하고, 우동의 끝에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과 같은 서수들을 새겨서 막새기와를 대신한 점은 특이할 뿐 아니라 미감을 더하고 옥개 밑의 연목(서까래) 표현과 과장없는 추녀의 곡선은 아름답다. 그러나 상륜부가 유실되어 완형은 볼 수 없다.
원효사는 조선사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서석산지북 유원-- 신라국사원효 애기산명수려 축-이거잉이기명지.."라 하여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믿을 수 없다. 고려의 충-왕대 (1314~1339년)에 -암종의 명승(명 : 부상)이 중창했다고 하며, 정주재란 때 불탄 것을 1609년 비 -경이 기와를 손수 구어 중창하고, 천왕문도 세웠다.
1636년 신원대사가 중수한데 이어 1637년 옥견대비가 석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02년에 회운대비가 대웅전을 복원했으며, 1847년 내원대비가 칠성전을 신축했고, 1930년 지웅현금정명월이 칠성각, 십왕전을 중수했는데 6.25 동란으로 전멸되는 비운을 맞았다.
1954년 가지 전린속과 지웅현, 지창선등이 대웅전을 우선 중창했는데, 1980년 가지 신법타가 대웅전을 해체복원하는 한편 --와 종무실 등을 신축, 사이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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