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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서울을 지키는 외곽의 4대 요새 중 하나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광주군 중부면 1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 將臺 >·돈대< 墩臺 >· 암문< 暗門 >·우물·보< 堡 >·누< 壘 >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官해 >,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百濟 >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 溫祚王代 >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新羅 > 문무왕< 文武王 > 13년(673)에 한산주< 漢山州 >에 주장성 < 晝長城, 일명 일장성< 日長城 > >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誌 >에 일장산성< 日長山城 >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 軍資庫 >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 結 >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 後金 >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 李适 >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仁祖 >2)이다. 인조는 총융사< 摠戎使 > 이서< 李曙 >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 女墻 > 1,897개·옹성< 甕城 > 3개·성랑< 城廊 >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 治所 >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 覺性 >을 도총섭< 都摠攝 >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 長慶寺 >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 純祖 >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 行宮 >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 下闕 >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正祖 >22) 한남루< 漢南樓 >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 客館 >인 인화관< 人和館 >을 1829년(순조< 純祖 > 29)에 수리하였다. 관해< 官해 >로는 좌승당< 左勝堂 >·일장각< 日長閣 >·수어청< 守禦廳 >·제승헌< 制勝軒 >을 비롯하여, 비장청< 碑將廳 >, 교련관청< 敎鍊官廳 >·기패관청< 旗牌官廳 >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鐘閣 >·마구< 馬廐 >·뇌옥< 牢獄 >·온조왕묘< 溫祚王廟 >·성황단< 城隍壇 >·여단< 여壇 >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 僧徒廳 >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 守禦 >는 처음에 총융청< 摠戎廳 >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 守禦廳 >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 李時白 >은 서성을, 총융대장< 摠戎大將 > 이서< 李曙 >는 북성, 호위대장< 扈衛大將 > 구굉< 具宏 >은 남성, 도감대장< 都監大將 > 신경진< 申景縝 >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 元斗杓 >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三田渡受降檀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승용차]
* 동문진입로
1) 천호대교 - 길동 - 중부고속도로I.C - 황산삼거리 - 광지원 - 동문 산성로타리
2) 중부고속도로 경안 I.C - 광지원 - 동문 - 산성로타리

* 남문진입로
1) 잠실 - 복정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로타리
2) 경부고속도로 양재I.C - 헌인릉 앞 - 세곡동 - 대왕교 - 약진로 - 산성로타리



[대중교통]
* 시내버스 15-1 이용
남한산성내 로타리 - 광지원 - 신장 - 암사동 - 명일동 - 천호동 - 동서울터미널(강변역)
* 시내버스 9 이용
남한산성내 로타리 - 남문 - 신흥주공아파트 - 성호시장 - 모란 - 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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