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금곡동 179-5
무등산록 북쪽 일대는 고려 말<高麗 末>에서 조선 전기<朝鮮 前期>에 걸쳐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제작하던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그중에서도 충효동 가마터가 대표적인 곳이다. 오래전부터 조선 전기의 가마터로 알려져 도굴의 피해가 많았고 도로공사 등으로 주변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산자락에 위치하고 규모도 커서 현재까지도 유적과 퇴적의 상당량이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부터 광주가마·무등산가마·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명품자기<名品磁器>를 생산하는 곳으로 막연하게 알려져왔다. 그후 1961년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일대에 6기<基>의 가마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1963년에 국립박물관에 의하여 가마터의 퇴적층 일부가 조사되면서, 가마의 대체적인 성격이 알려졌다. 1991년에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부근 일대에 대한 두 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모두 4기<基>의 가마가 확인되고 높이 3m에 이르는 퇴적층위가 조사되었으며, 이 조사를 통해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제작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가마의 구조는 2호 가마의 경우 총길이 20.6m 폭 1.3m 내외의 터널형으로 봉통부와 번조실·굴뚝시설·출입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진흙을 주종으로 돌을 섞어 쌓기도 하였던 것이 확인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광주의 자기소<磁器所> 한 곳이 군<郡> 동쪽 '이점<梨岾>'에 있다고 적혀 있는데, 기록과 이 부근의 현상<現狀>·지명<地名>과 출토유물의 편년이 모두 일치하고 있어서, 책의 자료조사가 완료된 143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후 약 70∼80년간 가마의 제작활동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다고 본다. 초기에는 상감<象嵌> 인화문<印花文> 분청사기만을 만들었으나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두 종류를 함께 제작하였다. 그후 박지<剝地>·조화<彫和> 등 비교적 장식과 제작이 간단한 분청사기가 만들어졌으나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종을 이루면서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반면에 백자는 제작이 본격화되며 질이 좋아지고 생산량도 많아져 분청사기를 굽는 가마에서 점차 백자가마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제작된 그릇의 종류는 대접·접시·전접시·합·종지·바래기·잔·두귀잔·마상배·매병·병·편병·장군·항아리·단지·벼루·각종 제기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백자에 비하여 분청사기의 종류가 더욱 다양하며, 크기도 백자가 작은 것을 주로 제작한데 반하여 분청사기는 크고 작은 것을 망라하고 있다. 분청사기의 장식에 사용된 문양소재는 국화·승렴·나비·모란·물고기·물짐승·동물·게·구름·연판·뇌문·당초·연주문 등으로 다양하며, 단독 혹은 여러 개를 조합하기도 하였다. 출토유물 중에는 각종 명문<銘文>이 적힌 예가 많은데, 제작지를 나타내는 무진<茂珍>·광<光>·전<全>, 관사의 이름을 표시한 내섬<內贍>, 관용<官用>인 공물<公物>임을 알리는 공<公>, 제작자의 이름을 적은 득부<得富>·귀산<貴山>, 제작시기나 수량을 쓴 정윤이<丁閏二>·칠<七>·십<十> 등 수십여 가지에 이르며, '어존' 이라고 한글로 적힌 예도 있다. 요도구<窯道具>는 갑발·도지미·그릇받침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고 명문<銘文>이 있는 예도 있다.
무등산록 북쪽 일대는 고려 말<高麗 末>에서 조선 전기<朝鮮 前期>에 걸쳐 상감청자·분청사기·백자를 제작하던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그중에서도 충효동 가마터가 대표적인 곳이다. 오래전부터 조선 전기의 가마터로 알려져 도굴의 피해가 많았고 도로공사 등으로 주변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산자락에 위치하고 규모도 커서 현재까지도 유적과 퇴적의 상당량이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일제시대부터 광주가마·무등산가마·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명품자기<名品磁器>를 생산하는 곳으로 막연하게 알려져왔다. 그후 1961년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일대에 6기<基>의 가마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1963년에 국립박물관에 의하여 가마터의 퇴적층 일부가 조사되면서, 가마의 대체적인 성격이 알려졌다. 1991년에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부근 일대에 대한 두 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모두 4기<基>의 가마가 확인되고 높이 3m에 이르는 퇴적층위가 조사되었으며, 이 조사를 통해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제작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가마의 구조는 2호 가마의 경우 총길이 20.6m 폭 1.3m 내외의 터널형으로 봉통부와 번조실·굴뚝시설·출입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진흙을 주종으로 돌을 섞어 쌓기도 하였던 것이 확인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광주의 자기소<磁器所> 한 곳이 군<郡> 동쪽 '이점<梨岾>'에 있다고 적혀 있는데, 기록과 이 부근의 현상<現狀>·지명<地名>과 출토유물의 편년이 모두 일치하고 있어서, 책의 자료조사가 완료된 143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후 약 70∼80년간 가마의 제작활동이 지속되다가 16세기 초에 중단되었다고 본다. 초기에는 상감<象嵌> 인화문<印花文> 분청사기만을 만들었으나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두 종류를 함께 제작하였다. 그후 박지<剝地>·조화<彫和> 등 비교적 장식과 제작이 간단한 분청사기가 만들어졌으나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종을 이루면서 생산량도 줄어들었다. 반면에 백자는 제작이 본격화되며 질이 좋아지고 생산량도 많아져 분청사기를 굽는 가마에서 점차 백자가마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제작된 그릇의 종류는 대접·접시·전접시·합·종지·바래기·잔·두귀잔·마상배·매병·병·편병·장군·항아리·단지·벼루·각종 제기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백자에 비하여 분청사기의 종류가 더욱 다양하며, 크기도 백자가 작은 것을 주로 제작한데 반하여 분청사기는 크고 작은 것을 망라하고 있다. 분청사기의 장식에 사용된 문양소재는 국화·승렴·나비·모란·물고기·물짐승·동물·게·구름·연판·뇌문·당초·연주문 등으로 다양하며, 단독 혹은 여러 개를 조합하기도 하였다. 출토유물 중에는 각종 명문<銘文>이 적힌 예가 많은데, 제작지를 나타내는 무진<茂珍>·광<光>·전<全>, 관사의 이름을 표시한 내섬<內贍>, 관용<官用>인 공물<公物>임을 알리는 공<公>, 제작자의 이름을 적은 득부<得富>·귀산<貴山>, 제작시기나 수량을 쓴 정윤이<丁閏二>·칠<七>·십<十> 등 수십여 가지에 이르며, '어존' 이라고 한글로 적힌 예도 있다. 요도구<窯道具>는 갑발·도지미·그릇받침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고 명문<銘文>이 있는 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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