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달성동 294-1
대구는 신라< 新羅 > 때 달구화현< 達句火縣 >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統一新羅 > 경덕왕< 景德王 >(742∼765) 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 大邱縣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이름은 이 달구화< 達句火 > 또는 달불성< 達佛城 >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 月城 >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 築城 >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 城郭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아래층 위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 木柵 >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에는 신라< 新羅 > 점해왕< 沾解王 > 15년(261)에 달벌성< 達伐城 >을 쌓고 나마극종< 奈麻克宗 >을 성주< 城主 >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후 고려< 高麗 > 공양왕< 恭讓王 > 2년(1390) 토성< 土城 >에 석축< 石築 >을 더했다.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29년(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 慶尙監營 >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 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성벽 상층부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토성 위에 석축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
대구는 신라< 新羅 > 때 달구화현< 達句火縣 >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統一新羅 > 경덕왕< 景德王 >(742∼765) 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 大邱縣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이름은 이 달구화< 達句火 > 또는 달불성< 達佛城 >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 月城 >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 築城 >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 城郭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아래층 위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 木柵 >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에는 신라< 新羅 > 점해왕< 沾解王 > 15년(261)에 달벌성< 達伐城 >을 쌓고 나마극종< 奈麻克宗 >을 성주< 城主 >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후 고려< 高麗 > 공양왕< 恭讓王 > 2년(1390) 토성< 土城 >에 석축< 石築 >을 더했다.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29년(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 慶尙監營 >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 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성벽 상층부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토성 위에 석축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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