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남산동 남성로 50
189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부산에 있던 선교 본부를 대구로 옮기고 1898년 기와집4동을 구입하여 교회당<敎會堂>으로 사용하다가 교세<敎勢>가 왕성해짐에 따라 1908년 새로운 교회당을 신축<新築>했다. 이 건물은 한국인 목수들이 지은 건물로 재래<在來> 양식과 그 동안 유입된 서구<西歐> 건축을 본딴 절충식 건물이었다. 교회당의 지붕은 한식 합각지붕 형태에 함석을 이었고, 목조 기둥사이에는 회벽<灰壁>이며 벽면에는 서구식의 오르내리창문을 좁고 긴 폭으로 설치하였다. 또한 벽돌 조적조로 세워진 종탑은 반원 아치로 출입구를 냈고 층간에는 string cornice를 돌렸으며, 탑부라 할 수 있는 상부의 첩탑은 나즈막한 모임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벽돌 조적조이기는 하나 외관구성에서 고딕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각부 비례와 조적수법 등이 정교하여 대구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후 1933년 9월 신도<信徒>들의 헌금<獻金>과 지방교회의 성금<誠金>을 합쳐 벽돌 조교회당을 신축하고 제일교회로 개명<改名>하였다. 1937년에는 이주열<李主悅>권사가 희사한 수성의 논10두락으로 벽돌조5층(높이 33m), 연 13평의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1969년 내부 중수 공사를 했고, 1981년 6월 성전이 협소<狹小>하여 건물의 뒷편으로 이어 156평을 증축하였다. 현재 이 건물의 1층에는 사무실, 유치원, 청소년 예배실 등을 두고 2층은 전체를 예배실<禮拜室>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으로는 대구광역시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의 《대구근대 건축물조사보고서(1988)》가 있다.
189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부산에 있던 선교 본부를 대구로 옮기고 1898년 기와집4동을 구입하여 교회당<敎會堂>으로 사용하다가 교세<敎勢>가 왕성해짐에 따라 1908년 새로운 교회당을 신축<新築>했다. 이 건물은 한국인 목수들이 지은 건물로 재래<在來> 양식과 그 동안 유입된 서구<西歐> 건축을 본딴 절충식 건물이었다. 교회당의 지붕은 한식 합각지붕 형태에 함석을 이었고, 목조 기둥사이에는 회벽<灰壁>이며 벽면에는 서구식의 오르내리창문을 좁고 긴 폭으로 설치하였다. 또한 벽돌 조적조로 세워진 종탑은 반원 아치로 출입구를 냈고 층간에는 string cornice를 돌렸으며, 탑부라 할 수 있는 상부의 첩탑은 나즈막한 모임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벽돌 조적조이기는 하나 외관구성에서 고딕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각부 비례와 조적수법 등이 정교하여 대구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후 1933년 9월 신도<信徒>들의 헌금<獻金>과 지방교회의 성금<誠金>을 합쳐 벽돌 조교회당을 신축하고 제일교회로 개명<改名>하였다. 1937년에는 이주열<李主悅>권사가 희사한 수성의 논10두락으로 벽돌조5층(높이 33m), 연 13평의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1969년 내부 중수 공사를 했고, 1981년 6월 성전이 협소<狹小>하여 건물의 뒷편으로 이어 156평을 증축하였다. 현재 이 건물의 1층에는 사무실, 유치원, 청소년 예배실 등을 두고 2층은 전체를 예배실<禮拜室>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으로는 대구광역시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의 《대구근대 건축물조사보고서(198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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