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남산동 219-3
이 건물은 대구 천주교회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안세화(Demange)주교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한 신학교< 神學校 > 건물이다. 1912년 안세화 주교는 신학교 건립< 建立 >을 위하여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신부를 초청하여 건립계획을 세우고 세계 각지역에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9월 중국 상해에서 익명< 匿名 >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 獻金 >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도< 信徒 >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 寄贈 >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으며 책임 목수는 프랑스 영사관< 領事館 >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이었다 한다. 1969년 대건학교에서는 좌측< 左側 > 익부< 翼部 >의 교실을 전면 blind arcsde부까지 넓혀 도서관으로 만들고, 우측 익부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자형으로 변형되었으나 남아 있는 외관은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 西歐 >의 근대건축양식과 함께 벽돌제조 및 조적기술을 대구부민에게 소개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풍에 준하는 비교적 순수한 서구식 건물로 벽돌의 조적이 정교< 精巧 >한 우수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대구 천주교회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안세화(Demange)주교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한 신학교< 神學校 > 건물이다. 1912년 안세화 주교는 신학교 건립< 建立 >을 위하여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신부를 초청하여 건립계획을 세우고 세계 각지역에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9월 중국 상해에서 익명< 匿名 >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 獻金 >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도< 信徒 >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 寄贈 >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으며 책임 목수는 프랑스 영사관< 領事館 >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이었다 한다. 1969년 대건학교에서는 좌측< 左側 > 익부< 翼部 >의 교실을 전면 blind arcsde부까지 넓혀 도서관으로 만들고, 우측 익부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자형으로 변형되었으나 남아 있는 외관은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 西歐 >의 근대건축양식과 함께 벽돌제조 및 조적기술을 대구부민에게 소개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풍에 준하는 비교적 순수한 서구식 건물로 벽돌의 조적이 정교< 精巧 >한 우수한 건물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