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대봉1동 655
이공제비는 이서< 李서 > 선생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의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 頌德碑 >이다. 당시 대구의 통과하천은 지금과 달리 용두산< 龍頭山 >-수도산-동산-달성공원< 達城公園 >앞-금호강< 金湖江 >으로 흘렀기에 홍수때마다 큰 피해을 입었다.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 즉위년(1776) 이서가 대구< 大邱 > 판관< 判官 >으로 부임하여 주민들의 피해를 염려, 정조 2년(1778) 주민 부담없이 사재< 私財 >를 털어 제방을 축조하였다. 이에 감읍한 주민들이 제방이름을 『이공제< 李公제 >』라 칭하고, 물길을 돌려 새로 만든 내를 새내 또는 신천< 新川 >이라 불러 그해 8월에 이 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후 없어진 것을 정조 21년(1797) 다시 세우고 순조< 純祖 > 5년(1805)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또 다른 비를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군수 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이범선< 李範善 >이 대구지방 수령< 守令 >으로 재직 당시인 고종< 高宗 > 광무< 光武 > 2년(1898) 큰 홍수로 이공제의 하류부분이 크게 부서져 대구읍성< 大邱邑城 >이 위험하게 되자 공은 민폐를 끼치지 않고 그 보수공사를 단시일에 완성하여 백성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이에 그 이듬해 백성들이 이 비를 세워 이공제비와 함께 보호해 왔다. 이 비석들은 지방수령으로 재직 당시 치수< 治水 >에 힘쓴 업적을 기려 백성들이 세운 것으로 오늘날의 대구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공제비는 이서< 李서 > 선생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의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 頌德碑 >이다. 당시 대구의 통과하천은 지금과 달리 용두산< 龍頭山 >-수도산-동산-달성공원< 達城公園 >앞-금호강< 金湖江 >으로 흘렀기에 홍수때마다 큰 피해을 입었다.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 즉위년(1776) 이서가 대구< 大邱 > 판관< 判官 >으로 부임하여 주민들의 피해를 염려, 정조 2년(1778) 주민 부담없이 사재< 私財 >를 털어 제방을 축조하였다. 이에 감읍한 주민들이 제방이름을 『이공제< 李公제 >』라 칭하고, 물길을 돌려 새로 만든 내를 새내 또는 신천< 新川 >이라 불러 그해 8월에 이 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후 없어진 것을 정조 21년(1797) 다시 세우고 순조< 純祖 > 5년(1805)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또 다른 비를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군수 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이범선< 李範善 >이 대구지방 수령< 守令 >으로 재직 당시인 고종< 高宗 > 광무< 光武 > 2년(1898) 큰 홍수로 이공제의 하류부분이 크게 부서져 대구읍성< 大邱邑城 >이 위험하게 되자 공은 민폐를 끼치지 않고 그 보수공사를 단시일에 완성하여 백성의 근심을 덜어 주었다. 이에 그 이듬해 백성들이 이 비를 세워 이공제비와 함께 보호해 왔다. 이 비석들은 지방수령으로 재직 당시 치수< 治水 >에 힘쓴 업적을 기려 백성들이 세운 것으로 오늘날의 대구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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