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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당 -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

by 넥스루비 2007. 8. 7.
대구 수성구 성동 산 22

고산서당은 언제 세워졌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년∼1570년)과 우복<愚伏> 정경세<鄭俓世>선생이 이곳에서 강학<講學>한 바 있다 하므로 1500년대에는 이미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서원은 조선 명종조에 향유<鄕儒>들과 윤희렴<尹希廉>이 재실을 짓고 퇴계선생에게 재호<齋號>를 청하여 재<齋>는 고산<孤山>으로, 문<門>은 구도<求道>로 한 퇴계의 수필<手筆>을 받았으며, 구도라는 편액은 지금도 남아있다. 사당<祠堂>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선조 38년(1605년)에 중건하였으며, 선조 40년(1607년)에 우복 정경세가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있으면서 강회<講會>를 열었는데 이때 당<唐>의 도독<都督> 이성삼<李省三>도 수강하였다고 한다. 숙종 16년(1690년)에 서원을 창건하여 고산<孤山>이라는 원호<院號>로서 퇴계와 우복 두 선생을 배향<配享>하였고, 영조 10년(1734년)에 강당<講堂> 및 동·서(東·西齋>를 건축하였으며, 영조 22년(1746년)에 원자<院字>를 중수하였다. 정조 13년(1789년)에는 문루<門樓>를 세우고 연안인<延安人> 김재구<金載久>가 기문<記文>을 택하였다. 순조 22년(1822년)에는 위패를 잃어 개조 봉안한 바있으며,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다. 그후 고종 16년(1879년)에 이르러 향유<鄕儒>들을 중심으로 강학계<講學契>를 수계<修契>하여 서원의 옛터에 강당만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고, 1964년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산서당은 성동<城洞>의 서원<書院>골 야산 중턱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 남천이 굽이 흐르고 넓은 고산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뒷편에 옛사당터에 퇴계와 우복선생의 강학유허비<講學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이 서당은 모르타르 마감한 기단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 지붕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3량가<樑架>로 막돌 덤벙 주초위에 정면 가운데 1주<柱>만 두리 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으로 세운 간결한 민도리집 형식으로 되어있다. 고산서당은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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