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성구 만촌동 산83-5
대구< 大邱 >에는 원래 토성< 土城 >이 있었으나 허물어져서 그 터만 남았던 것을 조선< 朝鮮 > 영조< 英祖 > 12년(1736) 경상도< 慶尙道 > 관찰사< 觀察使 > 겸< 兼 > 대구도호부사< 大邱都護府使 > 민응수< 閔應洙 >가 나라에 건의하여 석성< 石城 >이 축조되었다. 이 비< 碑 >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비문< 碑文 >은 민응수< 閔應洙 >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 白尙輝 >가 써서 영조 13년(1737) 2월에 대구 남문< 南門 >(영남제일관< (嶺南第一關 >) 밖에 세웠던 것이다. 조선< 朝鮮 > 고종< 高宗 > 광무< 光武 > 10년(1906)에 당시 대구군수< 大邱郡守 > 박중양< 朴重陽 >에 의해 성은 헐렸고, 이 비는 1932년에 현위치로 옮겨졌다.
대구< 大邱 >에는 원래 토성< 土城 >이 있었으나 허물어져서 그 터만 남았던 것을 조선< 朝鮮 > 영조< 英祖 > 12년(1736) 경상도< 慶尙道 > 관찰사< 觀察使 > 겸< 兼 > 대구도호부사< 大邱都護府使 > 민응수< 閔應洙 >가 나라에 건의하여 석성< 石城 >이 축조되었다. 이 비< 碑 >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비문< 碑文 >은 민응수< 閔應洙 >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 白尙輝 >가 써서 영조 13년(1737) 2월에 대구 남문< 南門 >(영남제일관< (嶺南第一關 >) 밖에 세웠던 것이다. 조선< 朝鮮 > 고종< 高宗 > 광무< 光武 > 10년(1906)에 당시 대구군수< 大邱郡守 > 박중양< 朴重陽 >에 의해 성은 헐렸고, 이 비는 1932년에 현위치로 옮겨졌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