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포곡면 가실리 204 호암미술관
1944년 평양< 平壤 > 평천리< 平川里 >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불상이다. 삼국기< 三國期 >에 유행한 반가상< 半跏像 >이 오직 백제< 百濟 >와 신라< 新羅 >에서만 그 유례< 遺例 >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불상으로 새로이 고구려< 高句麗 >의 유례를 첨가하게 된 것이다. 왼발을 받치기 위하여 약간 앞으로 내면 원형에 가까운 연화좌< 蓮華座 > 중앙의 원통형 좌대< 座臺 >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반가< 半跏 >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오른손은 그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이 발목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얹어 놓았으나,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손으로 턱을 괸 사유< 思惟 >의 모습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윗몸은 나신< 裸身 >으로 허리가 가늘고, 허리 이하의 상의< 裳衣 >는 얇은데 왼쪽 다리에서 고선< 孤線 >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오른쪽 다리 밑으로는 2단의 습< 褶 >을 그리면서 대좌를 덮었는데, 좌우로는 비대< 비帶 >가 길게 늘어져 있다. 머리에는 간단한 삼산관< 三山冠 >을 쓰고, 약간 앞으로 수그린 얼굴은 장방형이며, 두 눈은 반쯤 뜨고 코와 입술은 작은 편인데 미소는 뚜렷하지 않다. 두 귀는 길게 늘어지고, 목에는 삼도< 三道 >가 뚜렷하며, 장엄구는 팔찌가 있을 뿐이다. 뒷머리부분에는 굵직한 꼭지가 달려 있는데, 광배< 光背 >가 달려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전면< 全面 >에 녹이 나 있는데, 일찍이 불에 탔던 흔적이 있고, 오래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침식< 浸蝕 >이 심하나 곳곳에 아직도 도금< 鍍金 >이 남아 있다. 일부의 손상은 있으나 고구려< 高句麗 > 반가상< 半跏像 >으로는 초유< 초유 >의 것이며, 근엄< 謹嚴 >한 얼굴이나 청수< 淸秀 >한 몸집의 표현 등은 한국< 韓國 > 반가상 고찰에 한 좌표가 되는 귀중한 유례이다.
1944년 평양< 平壤 > 평천리< 平川里 >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불상이다. 삼국기< 三國期 >에 유행한 반가상< 半跏像 >이 오직 백제< 百濟 >와 신라< 新羅 >에서만 그 유례< 遺例 >를 볼 수 있었는데, 이 불상으로 새로이 고구려< 高句麗 >의 유례를 첨가하게 된 것이다. 왼발을 받치기 위하여 약간 앞으로 내면 원형에 가까운 연화좌< 蓮華座 > 중앙의 원통형 좌대< 座臺 >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반가< 半跏 >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오른손은 그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이 발목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얹어 놓았으나,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손으로 턱을 괸 사유< 思惟 >의 모습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윗몸은 나신< 裸身 >으로 허리가 가늘고, 허리 이하의 상의< 裳衣 >는 얇은데 왼쪽 다리에서 고선< 孤線 >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오른쪽 다리 밑으로는 2단의 습< 褶 >을 그리면서 대좌를 덮었는데, 좌우로는 비대< 비帶 >가 길게 늘어져 있다. 머리에는 간단한 삼산관< 三山冠 >을 쓰고, 약간 앞으로 수그린 얼굴은 장방형이며, 두 눈은 반쯤 뜨고 코와 입술은 작은 편인데 미소는 뚜렷하지 않다. 두 귀는 길게 늘어지고, 목에는 삼도< 三道 >가 뚜렷하며, 장엄구는 팔찌가 있을 뿐이다. 뒷머리부분에는 굵직한 꼭지가 달려 있는데, 광배< 光背 >가 달려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전면< 全面 >에 녹이 나 있는데, 일찍이 불에 탔던 흔적이 있고, 오래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침식< 浸蝕 >이 심하나 곳곳에 아직도 도금< 鍍金 >이 남아 있다. 일부의 손상은 있으나 고구려< 高句麗 > 반가상< 半跏像 >으로는 초유< 초유 >의 것이며, 근엄< 謹嚴 >한 얼굴이나 청수< 淸秀 >한 몸집의 표현 등은 한국< 韓國 > 반가상 고찰에 한 좌표가 되는 귀중한 유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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