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
이 건물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31년(1598)부터 영조< 英祖 >(1724∼1776)때까지 솔례촌< 率禮村 >의 곽씨일문< 郭氏一門 >에 포상된 12정려< 十二旌閭 >를 한곳에 모신 정려각< 旌閭閣 >으로서 12칸의 다포식< 多包式 > 팔작집이다. 6·25때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 비석 1구가 완파되었으나 1963년에 모두 중수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며 정려< 旌閭 >하였는데, 한 마을의 곽씨 일문에서 12장려가 나왔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라 하겠다. 중요 행적을 약기하면 다음과 같다. 1. 임진왜란때 안음현감< 安陰縣監 > 곽준< 郭준 >이 황석산성< 黃石山城 >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 戰死 >하게되자 자부< 子婦 >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2. 곽재훈< 郭再勳 >(망우당< 忘憂堂 > 곽재우< 郭再祐 >의 종제< 從第 >)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의 부친을 왜적으로부터 죽음으로 호위< 護衛 >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3. 곽재기< 郭再祺 >의 부인 광주이씨< 廣州李氏 >는 임진왜란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투신 익사< 溺死 >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4. 곽홍원< 郭弘垣 >의 부인 밀양박씨< 密陽朴氏 >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죽음으로써 남편을 옹호하였기에 현종< 顯宗 >이 정려했다. 5.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 安東權氏 >는 결혼 후 1년도 못되어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대신 죽기를 주야로 기원했으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편을 잃게 되자 식음을 전폐하여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이 정려했다.
이 건물은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31년(1598)부터 영조< 英祖 >(1724∼1776)때까지 솔례촌< 率禮村 >의 곽씨일문< 郭氏一門 >에 포상된 12정려< 十二旌閭 >를 한곳에 모신 정려각< 旌閭閣 >으로서 12칸의 다포식< 多包式 > 팔작집이다. 6·25때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 비석 1구가 완파되었으나 1963년에 모두 중수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며 정려< 旌閭 >하였는데, 한 마을의 곽씨 일문에서 12장려가 나왔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라 하겠다. 중요 행적을 약기하면 다음과 같다. 1. 임진왜란때 안음현감< 安陰縣監 > 곽준< 郭준 >이 황석산성< 黃石山城 >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 戰死 >하게되자 자부< 子婦 >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2. 곽재훈< 郭再勳 >(망우당< 忘憂堂 > 곽재우< 郭再祐 >의 종제< 從第 >)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의 부친을 왜적으로부터 죽음으로 호위< 護衛 >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3. 곽재기< 郭再祺 >의 부인 광주이씨< 廣州李氏 >는 임진왜란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투신 익사< 溺死 >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4. 곽홍원< 郭弘垣 >의 부인 밀양박씨< 密陽朴氏 >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죽음으로써 남편을 옹호하였기에 현종< 顯宗 >이 정려했다. 5.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 安東權氏 >는 결혼 후 1년도 못되어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대신 죽기를 주야로 기원했으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편을 잃게 되자 식음을 전폐하여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이 정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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