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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사 - 존재 위백규 선생을 모신 사당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다산사(茶山祠)는 장흥 방촌마을 출신인 조선후기 호남실학의 비조인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를 모신 사당이다.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02년 단(壇)으로 세워졌으나, 1984년 후손들이 단소 옆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사우의 규모는 사당 3칸, 내삼문(尊尙門), 강당(茶山齋), 외삼문(桂蓮門) 외 부속건물 3동이 있다.

위백규 선생은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 또는 계항(桂巷)이다. 진사 위문덕(魏文德)의 아들로 1727년(영조 3년) 계춘동(桂春洞)에서 태어났다. 1754년(영조 30년)에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세때 글을 해독하고 9세때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경학(經學)에 심혈을 쏟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필요없다며 천문·지리·율력·복서·병도·산수로부터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혀 통달했다 전한다. 25세때 이미 거유(巨儒)로 이름이 높았으며 1764년(영조40년) 38세때 동양삼국 및 세계지도와 지지(地誌)를 기술한 「환영지」와 「고금서(古琴書)」, 당시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정현신보(政弦新譜)」를 지었다. 다음해 생원복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는 한편「사성록(思成錄)」「자회가(自悔哥)」「경서조대(經書條對)」「독사차록(讀史箚錄)」등 1백여권에 가까운 저술을 남겼다.

1794년(정조18년) 68세때 호남지방의 해일로 위유사 서영보(慰諭使 徐榮輔)가 내려와 선생이 저술한 여러 책들을 보고 임금께 등용할 것을 소청하게 되어, 다음해 부사용(副司勇)의 군직을 받았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796(정조20년) 또다시 선공감 부봉사(線工監 副奉事)를 제수 받았지만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 봄 여러 차례 소명을 받고 입궐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한 만언상소문을 바치고 노환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부임되어 선정을 펴다 1798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때 존재선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죽천사(竹川祠)와 옥과 영귀서원, 영남 옥계사에 배향되었다. 영남 유림에서 불천위 배향을 받는 유일한 호남인물이다.

[승용차]
●광주(13번 국도) ⇒ 강진(2번 국도) ⇒ 장흥(23번 국도) ⇒ 관산읍 ⇒ 방촌마을
●부산(남해고속국도) ⇒ 광양(2번 국도) ⇒ 장흥(23번 국도)⇒ 관산읍 ⇒ 방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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