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시 저동 433번지
경포호 동북쪽 깊숙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 정면2칸, 측면2칸, 단층팔작지붕.
원래 이곳은 조선 명종 때 별감 장호가 지어 자신의 호를 따 '태허정(太虛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후 태허정은 소실, 장호는 조카사위 김몽호에게, 김몽호는 그의 아들 득헌에게, 득헌은 그의 사위 신만에게 이 정자터를 증여하였다.
그후 대학자인 삼연(三淵) 김창흡이 약 1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론하자 신만의 아들은 그를 위하여 초가를 지어 거처하게 하였다. 김창흡은 숙종 45년(1718)에 널리 명성을 떨친 학자로 경포호의 경치에 감탄하여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 26년(1750) 이 초가는 화재로 소실된다.
영조 30년(1754) 신성하의 손자인 진사 신정복은 강릉시 죽헌동에 있던 자기집 별당 안포당(案浦堂)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짓고 '호해정(湖海亭)'이라 이름했다. 1800년 초 김몽호의 후손이 신씨에게 정자를 인수하여 관리. 옥천동에 봉안된 김몽호의 영정을 이곳에 옮겨 매년 음력 9월중정에 다례를 올리고 있다.
소박하게 지은 이 정자는 온돌방과 마루방 사이에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필요시 한방으로도 사용하게 하였다. 현액은 자하 신위가 썼고, 삼연 김창흡, 옥산(玉山) 이우, 담재(蟾材) 민우수 등의 시문이 있다.
경포호 동북쪽 깊숙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 정면2칸, 측면2칸, 단층팔작지붕.
원래 이곳은 조선 명종 때 별감 장호가 지어 자신의 호를 따 '태허정(太虛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후 태허정은 소실, 장호는 조카사위 김몽호에게, 김몽호는 그의 아들 득헌에게, 득헌은 그의 사위 신만에게 이 정자터를 증여하였다.
그후 대학자인 삼연(三淵) 김창흡이 약 1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강론하자 신만의 아들은 그를 위하여 초가를 지어 거처하게 하였다. 김창흡은 숙종 45년(1718)에 널리 명성을 떨친 학자로 경포호의 경치에 감탄하여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 26년(1750) 이 초가는 화재로 소실된다.
영조 30년(1754) 신성하의 손자인 진사 신정복은 강릉시 죽헌동에 있던 자기집 별당 안포당(案浦堂)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짓고 '호해정(湖海亭)'이라 이름했다. 1800년 초 김몽호의 후손이 신씨에게 정자를 인수하여 관리. 옥천동에 봉안된 김몽호의 영정을 이곳에 옮겨 매년 음력 9월중정에 다례를 올리고 있다.
소박하게 지은 이 정자는 온돌방과 마루방 사이에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필요시 한방으로도 사용하게 하였다. 현액은 자하 신위가 썼고, 삼연 김창흡, 옥산(玉山) 이우, 담재(蟾材) 민우수 등의 시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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