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횡성군 공근면 창봉리 533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부터 흙을 빚어 불에 구운 토기<土器>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10세기<世紀> 초기에는 당나라의 도자기<陶磁器>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세롭게 고안된 문양이 조화를 이룬 세련<洗鍊>된 상감청자<象嵌靑瓷>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받아 유려<流麗>한 선의 아름다움을 갖는 청자 제작기법이 쇠퇴<衰退>하고, 조선초기에는 변질된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조선백자<朝鮮白磁>의 제작이 활발해져 전국에 139개소의 자기소<磁器所>와 185개소의 도기소<陶器所>가 설치되는 등 다양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가마는 파괴되고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비운을 겪었으며, 전란후 유일하게 남은 광주관요<廣州官窯>를 확장하여 조선백자를 중심으로 하는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전통도자기 제작기능을 이수한 장송모<長松模>는 전통자기제작 전반에 관한 연구를 해왔으며 1983년 전국민예품경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자기제작 기능이 전통에 충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현재 횡성군 공근면 창봉리에 강원도자문화연구회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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