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 경내의 배견정 좌측에 있는 영월군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의 기적(紀蹟) 비각이다. 비각안에 있는 기적비는 성균관장인 창산 성락서(昌山 成樂書)의 글로 1973년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그 당시 영월군수 자리는 사지라 하여 그 누구도 부임하기를 꺼려했다.신임 영월군수는 부임한날 밤 동헌에서 영문도 모르게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기에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영월군수로 제수된 관리들은 부임을 회피하거나 사양하니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작폐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이를 들은 박충원은 이번 기회에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다시 찾겠다는 각오로 영월군수직을 자청했다.박추원은 군수로 부임하던 날 의관을 정제하고 동헌에 등촉을 밝히고 첫날밤을 맞이했는데, 그날밤 단종의 혼령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이 혼절해 죽는데 박충원은 태연히 일어나 큰절을 한 후,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시옵니까?"하고 물으니, 단종은 이 담력이 큰 군수에게 허물어진 자신의 묘역을 수축하여 주면 큰 복이 있으리라는 당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박부사는 관속들을 거느리고 엄홍도의 후손과 함께 동을지산으로 가 잡초와 가시넝쿨에 가리워진 묘를 찾아 봉축하고 전물(奠物)을 갖추어 제를 지냈다.
그후부터 영월은 매년 풍년이 들어 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고, 박충원이 재임한 5년동안 관아에도 큰 변고가 생기지 않았다.박충원도 승진하여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었고 암행어사로, 전라도 관찰사로, 형조판서, 병조판서의 벼슬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 하였다. 마치 단종 혼령의 보살핌을 받은 듯이 말이다.
박충원은 자를 중초(仲初), 호를 낙촌 또는 정관재(靜觀齋)라 하였으며 본관은 밀양으로 1507년에 한양 동부 숭신방의 쌍계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중종 23년(1528) 생원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3년후엔 식년시에 합격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승정원 주서(注書), 홍문관 교리, 명나라 사신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 33년에 대사헌 임백령(林百齡)의 탄핵으로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물러났다가 다음해 잇단 임백령의 탄핵으로 삭탈관직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영월군수 자리는 사지라 하여 그 누구도 부임하기를 꺼려했다.신임 영월군수는 부임한날 밤 동헌에서 영문도 모르게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기에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영월군수로 제수된 관리들은 부임을 회피하거나 사양하니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작폐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이를 들은 박충원은 이번 기회에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다시 찾겠다는 각오로 영월군수직을 자청했다.박추원은 군수로 부임하던 날 의관을 정제하고 동헌에 등촉을 밝히고 첫날밤을 맞이했는데, 그날밤 단종의 혼령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이 혼절해 죽는데 박충원은 태연히 일어나 큰절을 한 후,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시옵니까?"하고 물으니, 단종은 이 담력이 큰 군수에게 허물어진 자신의 묘역을 수축하여 주면 큰 복이 있으리라는 당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박부사는 관속들을 거느리고 엄홍도의 후손과 함께 동을지산으로 가 잡초와 가시넝쿨에 가리워진 묘를 찾아 봉축하고 전물(奠物)을 갖추어 제를 지냈다.
그후부터 영월은 매년 풍년이 들어 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고, 박충원이 재임한 5년동안 관아에도 큰 변고가 생기지 않았다.박충원도 승진하여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었고 암행어사로, 전라도 관찰사로, 형조판서, 병조판서의 벼슬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 하였다. 마치 단종 혼령의 보살핌을 받은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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