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 고려 성종 12년(993) 목(牧)이 설치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전남지방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지위를 누려왔다.
나주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관저이기 때문에 상류주택의 안채아 같은 평면구조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순조 25년(1825) 건립 되었으며 건물구조는 전통양식 한옥으로 ㄷ자형이다. 특히 안채는 시내중심권에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많이 남아있어 당시 관청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전국의 대표적 지역이다.
금성관
목사내아의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체 상량문에 1825(순조25)에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간채는 1892년에 건립하였다. 이 집의 명칭은 홍재응목사(1860 - 1862)가 금학헌(琴鶴軒)에서 죽었다는 읍지의 기록으로 보아 내아의 명칭이 금학헌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나주목의 고지도(1872년)를 보면, 아사(衙舍(아사))와, 아문(衙門)·이청(吏廳)·장청(將廳)·객사(客舍)·향청(鄕廳)·군기고(軍器庫)·서창(書倉)·진창(賑倉)·훈연청(訓鍊廳)·옥(獄)·읍창(邑倉)이 관아 건물로서 각각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수루
금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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