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428
이 비는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가 명릉< 明陵 >을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인 영조< 英祖 >의 옛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 碑文 >은 영조< 英祖 >가 세제< 世弟 >시절인 경종< 景宗 > 원년(1721)에 부왕< 父王 >인 숙종< 肅宗 >의 탄신일< 誕辰日 >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 黔巖 > 덕수천변< 德水川邊 >에 머물면서, 이곳의 첨장< 站將 >이 소도둑을 잡았다가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도둑을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 王位 >에 오른 뒤에도 이를 거울 삼아 훌륭한 정치를 행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이곳은 의주< 義州 >로 가는 역사< 驛舍 >로 사용했던 곳이며, 현재 첨사< 站舍 >는 없고 하마비< 下馬碑 >만 남아 있다.
이 비는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가 명릉< 明陵 >을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인 영조< 英祖 >의 옛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 碑文 >은 영조< 英祖 >가 세제< 世弟 >시절인 경종< 景宗 > 원년(1721)에 부왕< 父王 >인 숙종< 肅宗 >의 탄신일< 誕辰日 >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 黔巖 > 덕수천변< 德水川邊 >에 머물면서, 이곳의 첨장< 站將 >이 소도둑을 잡았다가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도둑을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 王位 >에 오른 뒤에도 이를 거울 삼아 훌륭한 정치를 행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이곳은 의주< 義州 >로 가는 역사< 驛舍 >로 사용했던 곳이며, 현재 첨사< 站舍 >는 없고 하마비< 下馬碑 >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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