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103
부산지순절도< 釜山鎭殉節圖 >와 함께 개모< 改摹 >되어 최근까지 (동협< 東莢 > 안락서원< 安樂書院 >)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부산진순절도< 釜山鎭殉節圖 >와는 달리 교전의 양상을 다양하게 설명하였으며, 사경< 寫景 >을 곁들인 부성< 府城 >을 부감압축< 俯瞰壓縮 >시켜 놓고 교전에 따른 설화를 구체적으로 도시< 圖示 >하였다. 투시적< 透視的 > 도해< 圖解 >에 무리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효과적 도시< 圖示 >를 고려한 결과이며, 그러한 표현이 오히려 이해< 理解 >를 쉽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원본은 어떠하였는지 알 길이 없으나, 사경< 寫景 >은 배치나 묘사가 가작< 佳作 >이어서 부산진순절도< 釜山鎭殉節圖 >까지를 아울러 개모< 改摹 >하였다는 읍인< 邑人 > 변박< 卞璞 >은 동협부< 東莢府 > 전속의 화원< 畵員 >이었을 것으로도 추측이 된다. 모사< 模寫 >와 배치와 부채< 賦彩 >가 이만한 화폭< 畵幅 > 안에서는 적절히 조화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표현효과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왜군이 공략전에 제시한「가아도< 假我道 >」목패< 木牌 >나「가도난< 假道難 >」이라는 성중< 城中 > 회시목패< 回示木牌 >, 옥상에서 기와를 던져 왜병 3명을 죽였다는 (부민< 府民 > 김상< 金祥 >)과 2명의 (촌녀< 村女 >, 객사< 客舍 >) 앞에서 조복정장< 朝服正裝 >, 북향< 北向 >하여 순절을 기다리는 송상현< 宋象賢 > 부사< 府使 > ·부장< 副將 > 조영주< 趙英珪 >(양산군수< 梁山郡守 >), 하인< 下人 > 신여로< 申汝櫓 >, 정원루< 靜遠樓 > 앞에서 순절한 교수< 敎授 > 노개방< 盧蓋邦 >과 제자< 弟子 >들, 부사< 府使 >의 좌우에서 감투하는 군관< 軍官 > 송봉수< 宋鳳壽 > ·김희수< 金希壽 > 등 몇 명이 성내에 그려지고, 북문< 北門 > 밖으로 백마< 白馬 >를 달려 단기< 單騎 >로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경상좌병사< 慶尙左兵使 > 이각< 李珏 > 등이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왜군은 여유있게 포진되고 본영< 本營 > 앞에서 독전고< 督戰鼓 >를 두들기며 무너진 성< 城 >을 넘어 양도< 兩刀 >를 휘두르며 난입, 송< 宋 > 부사< 府使 >를 가해< 加害 >하려 한다. 이렇게 이 화면< 畵面 >에는 복잡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전진< 戰陣 >도 다양해졌거니와, 관망난무< 觀望亂舞 >하는 왜병의 복색< 服色 >도 다양해지며, 체구도 큰 것으로 변하고 있다. 모든 형상의 등차비례< 等差比例 >가 상당히 간과< 看過 >되어 있긴 하나, 권계< 勸戒 >를 목적으로 한 이 그림의 촛점은 절의< 節義 >의 상징인 송< 宋 > 부사< 府使 >와 충의를 버린 비겁한 병사< 兵使 > 이각< 李珏 >을 대조함에 있는 듯하다. 한 폭의 교전도이면서 천고< 千古 >에 수훈< 垂訓 >이 될 민족적 권계도< 勸戒圖 >라 할 것이다. 이 그림이 걸렸던 안락서원< 安樂書院 >의 전신< 前身 >인 사당< 祠堂 >은 송< 宋 > 부사< 府使 > 순절 후 1년이 되는 선조< 宣祖 >38년(1605)에 창건되었으며, 인조< 仁祖 >2년(1624)에「충렬사< 忠烈祠 >」라 사액< 賜額 >되고, 정발< 鄭撥 > 첨사< 僉使 >가 추향< 追享 >되었다. 충렬사< 忠烈祠 >가 안락서원< 安樂書院 >이 된 것은 효종< 孝宗 >3년(1652)이었으며 효종< 孝宗 >9년(1658)에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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