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국사관학교박물관 103
이 그림은 선조< 宣祖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부산진< 釜山鎭 >에서의 왜군< 倭軍 >과의 처절한 공방전< 攻防戰 >을 보여준 것이다. 한 폭< 幅 >의 그림이긴 하나 처절한 양상에 새삼 놀라움을 금하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 부산진< 釜山鎭 >의 진성< 鎭城 >은 지금 수정초등학교< 水晶初等學校 > 뒤에 위치하여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바로 해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 寫景 >을 곁들인 이 그림은 성곽을 위쪽으로 밀어 올리고 해안선을 대각< 對角 >으로 끊어 그 아래를 즐비하게 밀어닥친 대형 왜선< 倭船 >으로 빈틈없이 채워 그 뒤의 바다도 왜선으로 뒤덮여 있음을 암시하였다. 선중< 船中 >의 왜군< 倭軍 >과 접안< 接岸 > 상륙중인 왜군, 공성중< 攻城中 >인 왜군 등 끝이 없는 듯한 전력< 戰力 > 앞에 절의금도< 節義襟度 >로써 침착하게 수성< 守成 >하는 성내의 소수 아군< 我軍 >들이 엄청난 대비(對比)를 이룬다. 성하< 城下 >는 도검난무< 刀劍亂舞 >하는 많은 왜병으로 뒤덮여 있고 왜병이 아군보다 왜소< 倭小 >하게 그려진 것은 성내의 소수에 대한 다수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순절도< 殉節圖 >는 동협부순절도< 東莢府殉節圖 >와 함께 근년까지 (동협< 東莢 > 안락서원< 安樂書院 >)에 봉안< 奉安 >되었던 것이며, 영조< 英祖 >36년(1760)에 개모< 改摹 >된 것이다. 원래 광주시립박물관< 光州市立博物館 >에 있던 당포전양승첩도< 唐浦前洋勝捷圖 >와 함께 드문 임란전도< 壬亂戰圖 >임과 동시에 희유< 稀有 >의 교전도< 交戰圖 >이다. 숙종< 肅宗 >35년(1709)에 그려진 것으로 전하는 원본의 소전여부< 所傳與否 >는 분명하지 않다. 민족의 수난과 국기< 國基 >의 수호라는 엄청난 체험을 재현하여 모범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서 민족정기의 훈향< 薰香 >에 접할 수 있는 드문 유작< 遺作 >이다.
이 그림은 선조< 宣祖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부산진< 釜山鎭 >에서의 왜군< 倭軍 >과의 처절한 공방전< 攻防戰 >을 보여준 것이다. 한 폭< 幅 >의 그림이긴 하나 처절한 양상에 새삼 놀라움을 금하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 부산진< 釜山鎭 >의 진성< 鎭城 >은 지금 수정초등학교< 水晶初等學校 > 뒤에 위치하여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바로 해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 寫景 >을 곁들인 이 그림은 성곽을 위쪽으로 밀어 올리고 해안선을 대각< 對角 >으로 끊어 그 아래를 즐비하게 밀어닥친 대형 왜선< 倭船 >으로 빈틈없이 채워 그 뒤의 바다도 왜선으로 뒤덮여 있음을 암시하였다. 선중< 船中 >의 왜군< 倭軍 >과 접안< 接岸 > 상륙중인 왜군, 공성중< 攻城中 >인 왜군 등 끝이 없는 듯한 전력< 戰力 > 앞에 절의금도< 節義襟度 >로써 침착하게 수성< 守成 >하는 성내의 소수 아군< 我軍 >들이 엄청난 대비(對比)를 이룬다. 성하< 城下 >는 도검난무< 刀劍亂舞 >하는 많은 왜병으로 뒤덮여 있고 왜병이 아군보다 왜소< 倭小 >하게 그려진 것은 성내의 소수에 대한 다수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순절도< 殉節圖 >는 동협부순절도< 東莢府殉節圖 >와 함께 근년까지 (동협< 東莢 > 안락서원< 安樂書院 >)에 봉안< 奉安 >되었던 것이며, 영조< 英祖 >36년(1760)에 개모< 改摹 >된 것이다. 원래 광주시립박물관< 光州市立博物館 >에 있던 당포전양승첩도< 唐浦前洋勝捷圖 >와 함께 드문 임란전도< 壬亂戰圖 >임과 동시에 희유< 稀有 >의 교전도< 交戰圖 >이다. 숙종< 肅宗 >35년(1709)에 그려진 것으로 전하는 원본의 소전여부< 所傳與否 >는 분명하지 않다. 민족의 수난과 국기< 國基 >의 수호라는 엄청난 체험을 재현하여 모범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서 민족정기의 훈향< 薰香 >에 접할 수 있는 드문 유작< 遺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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