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81-1
이 비는 조선 세종대왕의 손자 이인의 신도비로서 정덕4년(정덕4년∼중종4년 1509)에 건립되었다. 이인(1465∼1507)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과 평산 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승헌대부에 오르고 목성공에 봉해졌다. 비문에는 공의 가계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자라면서 연산군의 핍박을 받아 아들과 함께 귀양살이를 한 왕족의 인생역정이 기록돼 있고 평소 자연과 더불어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생물을 아꼈으며 중종2년(1507) 춘추 43세로 병사하였다. 신도비는 귀부, 비신, 이수으로 구분 조형되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문의 도봉, 노원, 지명은 영조물로는 최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중종때 영의정 남곤이 지었고 글씨는 김희수가 썼다. 묘역에는 부인 진주 유씨와 쌍분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조선 세종대왕의 손자 이인의 신도비로서 정덕4년(정덕4년∼중종4년 1509)에 건립되었다. 이인(1465∼1507)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과 평산 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승헌대부에 오르고 목성공에 봉해졌다. 비문에는 공의 가계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자라면서 연산군의 핍박을 받아 아들과 함께 귀양살이를 한 왕족의 인생역정이 기록돼 있고 평소 자연과 더불어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생물을 아꼈으며 중종2년(1507) 춘추 43세로 병사하였다. 신도비는 귀부, 비신, 이수으로 구분 조형되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문의 도봉, 노원, 지명은 영조물로는 최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중종때 영의정 남곤이 지었고 글씨는 김희수가 썼다. 묘역에는 부인 진주 유씨와 쌍분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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