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류씨의 대종택 입향시조인 전서공(典書公 柳從惠, 겸암의 6대조)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입향 당시 처음 지은 건물이 아직 사랑대청 건물로 남아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13세기말에 지어졌다고 하니 하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제일먼저 터를 잡은 건물이자 종택답게 명당을 차지하여 하회에서 보기 드물게 정남향(癸坐丁向)을 취하고 있다. 1500여평의 대지 위에 대종택다운 위치와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조선조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사랑채 정면의 입암고택(立巖古宅)이란 현판의 입암은 겸암공의 부친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영)을 일컬으며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는 겸암공 6대손인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이며 현판은 근세사람 최동진(崔東鎭)의 자필이다.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있다. 현재는 겸암 종택으로 16대 종손 류상붕(柳相鵬, 50세)씨가 거주하고 있다.
양진당의 거리마당을 들어서면 솟을대문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좌우로 행랑채가 가로로 길게 이어져 건축되어 있으며 ㅁ자형의 안채와 안채에 이어서 북쪽으로 행랑채와 나란하게 지은 일(一)자형의 사랑채가 있다. 따라서 안채와 사랑채는 거리부엌과 광 등이 그 사이에 끼어있어 신발은 신고 다녀야 통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방과 마루로 이어져 있어 버선발로도 오갈 수 있도록 지어졌다. 다만 사당채만 마당 건너 북쪽 오른쪽에 별채로 자리잡고 있다.
솟을대문에 붙여진 입춘방(立春榜)이 이집의 가세를 말해주는 것 같다. 행랑채의 맨 오른쪽(동쪽) 끝은 온돌방이며 그 다음이 외양간이다. 대문간 왼편으로 연결된 서쪽 역시 온돌방이다. 그리고 방에 불을 때도록 아궁이가 딸린 부엌이 있고 그것이 이어서 마루와 방이 하나씩 있는데 각각 2칸씩이며, 안채의 중문과 연결되어 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가운데 마당을 격해서 사랑채가 위치한다. 이 사랑채는 정면 5칸과 측면 2칸, 10칸의 크기로써 여기에는 6칸 대청이 있다. 이 대청에 연접하여 2칸 사랑방이 있고 그 왼편 서쪽 끝에 각각 방 한칸씩을 두었다.
안채는 서쪽 모서리에 4칸짜리 커다란 부엌을 두고 오른쪽으로 정면이 2칸, 측면이 1칸 반인 안방이 있으며 안방과 나란히 한칸반 크기의 온돌방이 붙어있다. 안방 전후면 양쪽에는 폭이 반칸인 툇마루가 각각 달려있다. 한편 안방 오른쪽 곧 동쪽에는 역시 정면 2칸의 넓은 안대청이 있고 이 대청은 다시 한칸 남짓한 건넌방에 연결된다. 그리고 이 방 다음에 한칸으로 이루어진 마루가 있고 그것이 사랑채로 연결되고 있다.
건너방 앞쪽으로 마루가 있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다시 방 하나가 있으며 이 방은 거리 부엌으로 이어지고 이 부엌은 중간문과 붙어 있어 행랑채와 연결된다. 사랑채 뒤꼌에 별채로 지어진 사당은 크고 작은 두 개로 꾸며져 있는데 큰 사당에는 양진당 종손의 4대조에 이르는 신주들과 입암공(立巖公)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셔두었다. 작은 사당은 별묘로서 겸암(謙庵)의 불천위를 별도로 모셔 두었다. 입암공 부자가 모두 불천위이므로 한 사당에 두 불천위를 다 모실 수 없어서 별묘로 작은 사당을 새로 짓고 겸암의 불천위를 따로 모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진당은 실용적인 점에서 충효당이나 북촌댁에 비해 뒤진다고 한다. 건축양식이 고려시대 것을 모방했다거나 조선조 초기의 것을 답습했다는 비교적 건축연대가 오랜 것으로 보아 이 집은 실용성보다 종택으로서의 일종의 관습성이 지배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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