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시 대호동 646-1
정렬사는 임진왜란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 선생을 비롯한 나주의 충절인물 다섯분을 모신 사우다. 최초의 건립은 선조39년(1606) 나주고등학교 뒷편 월정봉 아래에 건립 이듬해(1607) 정렬사로 사액되면서 사우를 옛 나주잠사공장 부근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러번 자리를 옮기고 보수를 거쳐 현재 위치로는 1984년 옮겼다. 정렬사비는 김천일 선생의 임란의병활동을 기록한 비로 1626년(인조4) 건립 하여 몇차례의 위치가 바뀌어 현재는 정열사 묘정(廟廷)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장유(張維)가 짓고 이숙(李潚)이 썼다. 당시 관찰사 민성징, 목사 유여각 조홍립이 세웠다. 비의 규모는 높이 173㎝ 폭64㎝ 두께 18㎝로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으며 돌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정렬사비는 정렬사의 창건과정과 정렬사에 배향된 중심인물인 김천일선생의 전공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천일선생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의 의병운동에 앞장섰고 호남오현의 하나로 꼽힐정도로 학덕이 뛰어났으며, 선정을 베푼 관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건제(建濟),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한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군기시주부, 임실현감, 순창군수, 담양부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1589년(선조22) 수원부사가 되어 세납문제를 바로 잡았으나 오히려 특권층의 헐뜯는 말에 의해 그해 8월에 파직당하고 말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등과 함께 호남지방 의병의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순절하였다. 1603년(선조36)의 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진주의 창열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등에도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정렬사는 임진왜란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 선생을 비롯한 나주의 충절인물 다섯분을 모신 사우다. 최초의 건립은 선조39년(1606) 나주고등학교 뒷편 월정봉 아래에 건립 이듬해(1607) 정렬사로 사액되면서 사우를 옛 나주잠사공장 부근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러번 자리를 옮기고 보수를 거쳐 현재 위치로는 1984년 옮겼다. 정렬사비는 김천일 선생의 임란의병활동을 기록한 비로 1626년(인조4) 건립 하여 몇차례의 위치가 바뀌어 현재는 정열사 묘정(廟廷)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장유(張維)가 짓고 이숙(李潚)이 썼다. 당시 관찰사 민성징, 목사 유여각 조홍립이 세웠다. 비의 규모는 높이 173㎝ 폭64㎝ 두께 18㎝로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으며 돌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정렬사비는 정렬사의 창건과정과 정렬사에 배향된 중심인물인 김천일선생의 전공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김천일선생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의 의병운동에 앞장섰고 호남오현의 하나로 꼽힐정도로 학덕이 뛰어났으며, 선정을 베푼 관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건제(建濟),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업한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군기시주부, 임실현감, 순창군수, 담양부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1589년(선조22) 수원부사가 되어 세납문제를 바로 잡았으나 오히려 특권층의 헐뜯는 말에 의해 그해 8월에 파직당하고 말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등과 함께 호남지방 의병의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다.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순절하였다. 1603년(선조36)의 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진주의 창열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등에도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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