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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대신사적현판 - 가로 180cm, 세로 54cm로 모두 71행(行)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현판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순창군 순창읍 62-1

순창 성황대신 사적현판(城隍大神 事跡懸板) 2점은 소나무 판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크기는 가로 180cm, 세로 54cm로 모두 71행(行)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현판에 새겨진 글자는 한문과 이두로 각인되어 있으며, 내용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문신인 설공검(薛公儉, 1224 ~ 1302)을 성황대신(城隍大神)을 대부인(大夫人)으로, 그 신상(神像)을 모시고 매년 단오날(단오절-端午節)에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는 내용이다.
순창의 성황당은 지금은 철훼되어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전해지는 얘기로는 1940년경까지는 지금의 옥천동(순화리 445)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설공검(薛公儉)은 자를 상검(常儉)이라 하고, 호를 경재(敬齋)라 하였으며, 본관(本貫)은 순창(淳昌) 이다. 그는 1224년(고려, 고종 11년)에 아버지인 추밀원 부사(樞密院 副使) 신(愼)과 어머니 밀양박씨 (密陽朴氏) 사이의 공검(公儉), 인검(仁儉) 두 아들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여기서 참고로 간략한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설씨(薛氏)로 맨처음 순창에 발을 들여놓고 터를 닦은 사람은 고려 제17대 인종(仁宗, 1122 ~ 1146)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설자승(薛子升)이다. 설자승은 서울(개성)에 머물다가 1126년에 이자겸(李資謙, ? ~ 1126)의 난이 일자 이를 피하여 이곳 순창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예부시랑을 지내고 왕으로부터 순화백 (淳化伯, 순화는 순창의 또다른 옛이름)에 봉작되자, 그때로부터 본관을 순창(淳昌) 또는 순창의 또다른 옛이름인 옥천(玉川)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설자승의 선대는 우리나라 성씨중 그 역사가 오래된 경주설씨(慶州薛氏)인바, 원효대사(元曉大師), 설총(薛聰)과 같은 문종이다. 설자승은 바로 이 설총의 17세손이다. 그리고 설자승이 이자겸의 난을 피해 찾은 곳이 이곳 순창인 것은 그의 처가인 순창조씨(淳昌趙氏)의 터전이 이곳 순창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화백에 봉작되어 순창에 살기 시작한 설자승은 공겸의 고조(高祖)이며, 그의 아들 즉 공검의 증조 (曾祖)인 정숙(挺淑)은 사문박사(四門博士)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며 공검의 조부(祖父)인 선필(宣弼)은 태자첨사(太子僉事)였는데, 그는 여덟아들을 두었고, 큰 아들인 신(愼)을 비롯한 세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는 등 모두 영달하였다.
앞에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이 고장에 입향한 설씨는 설자승 이래로 대를 띠우지 않고 대과에 급제한 명문을 이루었다. 이러한 가계에서 태어난 공검(公儉)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은 강직하였으며, 일찍부터 학문이 탁월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高宗 45년)에 예부낭중(禮部郎中)이 되었다.그 후 충렬왕 때인 1274년에 우승선(右承宣)이 되었고, 1276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그 뒤로 감찰대부 지첨의부사 참리(監察大夫 知僉議府事 參理)를 거치는등 조정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옭고 그름을 분명히 처리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다졌다.
특히, 1278년(충렬 4년)에는 권문세가들의 횡포로 정치가 좌우되어 나라의 기강이 혼란하여지고, 왕권이 쇠약해짐으로 「필도적」을 새로이 설치하여 제신들과 중요 정사를 처리하며 쓸데없는 관리를 몰아내고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등 서정쇄신을 단행하여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조정에서나 향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던 그는 1302년(충렬왕 28년)에 78세로 타계하였다. 그를 잃은 각계의 애석한 마음이 전해지는 가운데 조정에서는 왕으로부터 그에게 문량공(文良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1337년 (충숙왕 6년)에는 왕명으로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한편, 순창에서는 그를 이 지방을 지켜주는 성황대신으로 모시어 제사지내며 받들었다. 설공검(薛公儉)이 순창의 성황대신으로 모셔진 때에 대해서 현판의 기록은 1281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라면 설공이 아직 활동중인 때라 살아있는 그가 성항대신으로 모셔졌다는데는 상당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전북 향토 사학자이신 양만정(楊萬鼎) 선생도 현판의 첫기록이 고려 충렬왕조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때인 1563년(조선 명종 18년)이었으며, 그 후로도 여러차례 고쳐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전설화한 옛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또 다른 자료에서는 1341년(충혜왕 2년)에 지방 수호신으로 목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매년 네차례 제사를 지내며 받들었다는 기록도 있음을 참고로 밝힌다.
순창의 성황당의 신당은 1940년경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일제에 의해 파손되고 그 자리에 현판만 나뒹굴던 것을 수습하여 현재는 옥천향토문화연구소(玉川鄕土文化硏究所)의 양정욱(楊正旭)선생께서 보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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