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산성은 돌을 쌓은 흔적과 유물이 일부 출토되었을뿐 예전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두번이나 초토화됐던 동주산성의 뼈아픈 역사는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거란족이 침범했던 고종 4년(1217)에 성이 적에게 유린됐으며 몽고군이 침범해온 고종 40년(1253)에도 또 다시 함락되는 비애를 겪었다. 몽고군에게 대패한 주원인이 전력 차이가 아닌 내부 갈등 때문이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이 지역의 방호별감 백돈명은 백성들을 산성에 모아놓고 출입을 금했다. 고을 아전들이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농민들을 교대로 내보내 벼를 베어오도록 제안했으나 백돈명은 이를 무시하고 아전마저 죽여버렸다. 성안에 갇힌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건 당연지사. 이렇게 성안이 소란스러울 때 몽고군이 공격을 해왔다. 백돈명은 군사를 추스려 싸움에 나섰으나 달아나는 군사가 많았다. 몽고군은 성내로 들어와 백돈명과 관리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갔다. 적전분열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던 것이다.
거란족이 침범했던 고종 4년(1217)에 성이 적에게 유린됐으며 몽고군이 침범해온 고종 40년(1253)에도 또 다시 함락되는 비애를 겪었다. 몽고군에게 대패한 주원인이 전력 차이가 아닌 내부 갈등 때문이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이 지역의 방호별감 백돈명은 백성들을 산성에 모아놓고 출입을 금했다. 고을 아전들이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농민들을 교대로 내보내 벼를 베어오도록 제안했으나 백돈명은 이를 무시하고 아전마저 죽여버렸다. 성안에 갇힌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건 당연지사. 이렇게 성안이 소란스러울 때 몽고군이 공격을 해왔다. 백돈명은 군사를 추스려 싸움에 나섰으나 달아나는 군사가 많았다. 몽고군은 성내로 들어와 백돈명과 관리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갔다. 적전분열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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