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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통명전 - 사도세자의 비극과 인현왕후의 참극이 벌어졌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창경궁 내전의 정전 겸 연회소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처음 짓고,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된 것인데, 그 후 화재를 입어 없어진 것을 순조 34년(1834)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통명전이란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명정전 뒤쪽으로 나오면 경춘전과 환경전이 나타나고 그 뒤로 높은 화계를 배경으로 통명전(通明殿, 보물 제818호)이 보인다. 양화당 서쪽 제일 끝 건물이다. 통명전은 창경궁의 중궁전이다. 용마루가 없다.
선조의 왕후 인순 심씨가 여기서 서거하였다.
순조 30년(1830) 큰 불에 함께 탔다가 순조 32년 중건이 시작되어 이듬해 완공되었다고 전한다.

건물 남쪽에 높고 넓은 단층의 월대를 쌓아 연회나 의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월대 뒤에 정면 7칸, 측면이 4칸인 통명전이 버티고 서있다. 평면은 4면에 1칸의 퇴를 두르고 앞면 3칸은 개방하여 출입구를 마련한 다음 그 안쪽 3×2칸 규모인 대청을 두고 대청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닥 전체를 마루를 깔아 놓아서 평면의 짜임새를 확인 할 수가 없다.

통명전에는 사도세자의 비극과 인현왕후의 참극이 벌어졌던 곳이다.
사도세자는 그 지옥 같은 뒤주 속에서 8일간의 고통을 겪은 끝에 기어코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였다(1762년 윤 5월 21일). 운명이라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외아들 세자를 강박증으로 몰아넣었을 만큼 미워하고 호령했던 종잡을 수 없는 영조의 편벽성 때문에 세자는 욕구불만을 표출시키기 위해 광기를 부렸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비명에 세상을 떠났던 자리가 바로 통명전 앞 뜰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곳은 숙종때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암투를 벌였던 현장이기도 한다. 장희빈이 낙선재 부근 취선당에 거처할 때 목인(木人)과 새, 고기 등을 묻어 놓고 왕비를 저주한 곳이 바로 통명전이다. 이때 인현왕후는 이웃한 경춘전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장희빈이 궁녀를 매수하여 왕비의 밥상에 놓인 게젓에다가 꿀을 넣어 먹였다. 이 게젓을 먹은 왕비는 몇시간 되지 않아 승하하고 말았다. 그후 장희빈은 죄값을 받아 취선당 앞뜰에서 숙종의 사약을 받고 죽었다.

통명전 뒤쪽 화계 아래에 '열천(列泉)'이라 이름하는 샘이 하나 있다. 샘은 통명전과 양화당 앞뜰에도 여기 저기 보인다. 다른 궁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물 집합소이다.
통명전 서쪽에는 아담한 연당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이만큼 귀여운 연당은 다시 없을 정도로 앙증스럽게 꾸몄다.
화계 아래에서 솟아나는 물을 화강석으로 다듬은 물길을 타고 연당에 떨어지도록 배려하였다.

연당은 화강석을 다듬어 사방을 쌓았고 감싸고도는 돌난간 기둥머리마다 금방 피어날 듯한 꽃봉우리와 연잎이 새겨져 있다. 거기다 못 가운데 성을 만들 듯이 작은 석대 하나씩을 설치하고 연당의 중간쯤에 돌다리를 놓아 답도(踏도)가 되게 하였다.
천연스러운 마당 가꾸기가 통례인 궁에서 지극히 인위적인 연당을 만들고 기묘하게 장식을 하였다.

[대중교통]
* 지하철
4호선 혜화(4)-도보 15분
* 버스
창경궁 16, 2, 20, 205, 205-1, 34-1, 5-1, 710, 8, 8-1, 84,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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