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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 돌담길 따라 떠나는 시간 여행

by 넥스루비 2016. 11. 23.

파리지엔느를 위해 몽마르트 거리가 있다면, 서울의 연인에겐 덕수궁 돌담길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 받는 덕수궁은 전통과 현대의 멋이 어우러진 도심 속의 고궁이다.

원래 덕수궁은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으로, 처음 궁으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가 이 곳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면서부터이며, 치욕스러운 역사의 한 장인 한일 의정서와 을사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대한문 앞에서 펼쳐지는 왕궁수문장 교대의식도 또 다른 볼거리이다.

● 역사적 배경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은 본래 정릉동 행궁(行宮)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광해군 3년(1611)에 경운궁(慶運宮)이라 개칭되었다. 이 정릉동 행궁은 그 전신이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이었는데, 선조 26년(1593) 10월 왕과 조정이 서북 피난지에서 환도하여 행궁으로 삼게 된 이래 궁궐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 3년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정식 궁명이 붙여지기까지는 그 소재가 정릉동인 까닭으로 정릉동 행궁(行宮)이라고 불리었다. 선조는 왕 26년 10월 이 곳을 행궁으로 사용한 이후 41년 2월 승하할 때까지 이 곳에서 정무를 총괄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이 곳 행궁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여 7년(1615) 4월 창덕궁(昌德宮)으로 이거하기에 이르기까지 이 곳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광해군 3년 10월에 정식으로 경운궁의 궁호가 호칭된 이후부터는 도성내 왕궁의 하나로 되었다. 인조는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경운궁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에서 인목대비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 궁은 조선 후기에 명례궁(明禮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고종은 일제강점 후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내었으며 그가 승하한 1919년 이후부터는 주로 빈객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석조전(石造殿)은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식 건물로서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장소로 사용된 일도 있고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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