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호국사찰.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 등과 절 바깥에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이 곳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살다 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는 해동종을 창시하였는데 그것이 분황종이라고 불릴 만큼 분황사와 원효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는데 설총이 예배할 때마다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국보 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인 분황사탑이 있다. 자장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고려시대 구리 30만 6천 7백근을 들여 약사여래불상을 만들어 안치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를 그려 유명한 솔거의 관세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하나 역시 남아있지 않다. 1965년 뒤쪽 부근 웅덩이에서 좌불 등 많은 양의 석불들이 발견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진열되었다.
[대중교통]
● 경주시외버스터미널 경주역 ⇒ 보문행 시내버스 이용 분황사앞 하차
이 곳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살다 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는 해동종을 창시하였는데 그것이 분황종이라고 불릴 만큼 분황사와 원효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는데 설총이 예배할 때마다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국보 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인 분황사탑이 있다. 자장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고려시대 구리 30만 6천 7백근을 들여 약사여래불상을 만들어 안치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를 그려 유명한 솔거의 관세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하나 역시 남아있지 않다. 1965년 뒤쪽 부근 웅덩이에서 좌불 등 많은 양의 석불들이 발견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진열되었다.
[대중교통]
● 경주시외버스터미널 경주역 ⇒ 보문행 시내버스 이용 분황사앞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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