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
진산이 오른쪽으로 휘감아서 우백호< 右白虎 >를 이루고 또 다른 산줄기 왼쪽에서 휘어 돌아들어 좌청룡< 左靑龍 >을 형성< 形成 >한다. 이집은 국< 局 >이 열리는 수구< 水口 >를 향< 向 >하여 배치< 配置 >되었는데 수구< 水口 >가 트인 곳에는 나무를 가로로 심어 국< 局 >안의 영역감< 領域感 >을 강화< 强化 >시킨다. 집은 몸채의 공간< 空間 >과 아래채의 공간< 空間 >으로 나뉘어지는데 두 개의 나란한 축으로 되었다. 아마도 별도의 살림채로 만들었다고 여겨지지만 너무 지나치게 붙어 있어 별도의 집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몸채의 축상< 軸上 >에는 앞쪽에 사랑채를 가로로 놓고 뒤쪽에는 안채를 이자< 二字 >로 배치< 配置 >했다. 안마당 서쪽에는 광채를 배치< 配置 >해 막고 동쪽에는 안채를 ㄱ자< 字 >로 꺾어서 공간감< 空間感 >을 조성< 造成 >하였다. 사랑채는 높은 축대< 築臺 >위에 자리하며 축대< 築臺 > 앞에 목련이나 향나무등을 심어서 공간감< 空間感 >을 형성< 形成 >할 뿐 전면< 前面 >에는 틔워 두었다. 아래채는 사랑채 동쪽에 가로로 북향< 北向 >하여 배치< 配置 >되며 사이에는 대문< 大門 >이 놓였다. 아래채는 거꾸로 앉았기 때문에 오히려 남쪽에 대나무등을 심어서 시설을 차단< 遮斷 >하고 북쪽에 아랫마당을 두었는데 그 앞에는 세로로 헛간채가 축조< 築造 >되었다. 안채는 원래 3간< 間 >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 推定 >하나 20세기 초에 사랑채를 지으면서 안채를 덧달아 증축< 增築 >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건물< 建物 >들은 모두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안채는 원래 전퇴 3간< 間 >집이었으나 덧달아내어 6간< 間 >ㄱ자형< 字形 >을 만들었다. 왼쪽에 부엌을 두고(아랫퇴는 역시 나중에 덧붙였음) 안방, 웃방 그리고 앞퇴의 툇마루가 되며 다음은 대청< 大廳 >, 맨 끝이 아랫방인데 머릿퇴에 역시 툇마루가 시설< 施設 >되었다. 꺾어져서 헛청이 마련되어 부엌이면서 헛간이 되고 아래채로의 통로가 된다. 뒷퇴에는 처마 밑에 덧기둥을 한줄 더 세워서 토방처럼 이용한데 구조< 構造 >를 보강< 補强 >한 것이기도 하다. 구조< 構造 >는 2고주4량, 곧 전면< 前面 >의 지붕이 후면< 後面 >보다 긴 민가식< 民家式 > 기법< 技法 >을 쓴다. 도리는 납도리이며 모를 죽인 정도이고 장혀는 쓰지 않았다. 퇴보는 무지개꼴로서 고주머리에 맞추어졌고 기둥은 네모이며 덤벙주초 위에 세웠다. 댓돌은 외벌대 장대석< 長臺石 >이며 지붕은 우진각 초가< 草家 >이다. 사랑채는 4간< 間 > 전퇴집으로서 머릿퇴를 두었다. 간살이는 서쪽에 대문간< 大門間 >을 배치< 配置 >하고 다음은 사랑부엌, 2간< 間 >사랑방으로 구성< 構成 >되며 사랑방의 앞퇴와 머릿퇴에는 마루가 놓였다. 사랑부엌 앞퇴도 마루가 깔렸는데 툇마루에서 이용하는 토광으로 쓰인다. 구조< 構造 >는 1고주5량이며 보의 단면은 둥근네모꼴로 대강 바심질을 했다. 대문간< 大門間 > 지붕틀은 등굽은 중도리(소꼬리보, 충량)를 가로로 걸쳐대고 그 등 위에 외기를 세로로 놓아 중간에 등굽은 중도리를 올리며 여기 등 위에 추녀 끝을 걸쳤는데 전형적< 典型的 >인 민가기법< 民家技法 >이다. 막돌 허튼층쌓기 댓돌이며 덤벙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우진각 초가지붕집이다. 안마당 서쪽은 단간< 單間 > 광채를 만들고 안채와의 사이는 뒷길로 나가는 편문< 便門 >을 시설< 施設 >했으며 사랑채와의 사이는 ㄱ자< 字 >로 담장을 두르고 장독등을 두는 공간< 空間 >으로 이용하고 있다. 아래채는 일자< 一字 > 6간< 間 > 전퇴집으로서 부엌+안방+웃방(앞툇마루)인 기본형에 2개의 광을 동쪽에 덧붙인 것이다. 여기에는 며느리가 거처하는데 같은 울안에 살면서도 살림은 따로한다.
진산이 오른쪽으로 휘감아서 우백호< 右白虎 >를 이루고 또 다른 산줄기 왼쪽에서 휘어 돌아들어 좌청룡< 左靑龍 >을 형성< 形成 >한다. 이집은 국< 局 >이 열리는 수구< 水口 >를 향< 向 >하여 배치< 配置 >되었는데 수구< 水口 >가 트인 곳에는 나무를 가로로 심어 국< 局 >안의 영역감< 領域感 >을 강화< 强化 >시킨다. 집은 몸채의 공간< 空間 >과 아래채의 공간< 空間 >으로 나뉘어지는데 두 개의 나란한 축으로 되었다. 아마도 별도의 살림채로 만들었다고 여겨지지만 너무 지나치게 붙어 있어 별도의 집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몸채의 축상< 軸上 >에는 앞쪽에 사랑채를 가로로 놓고 뒤쪽에는 안채를 이자< 二字 >로 배치< 配置 >했다. 안마당 서쪽에는 광채를 배치< 配置 >해 막고 동쪽에는 안채를 ㄱ자< 字 >로 꺾어서 공간감< 空間感 >을 조성< 造成 >하였다. 사랑채는 높은 축대< 築臺 >위에 자리하며 축대< 築臺 > 앞에 목련이나 향나무등을 심어서 공간감< 空間感 >을 형성< 形成 >할 뿐 전면< 前面 >에는 틔워 두었다. 아래채는 사랑채 동쪽에 가로로 북향< 北向 >하여 배치< 配置 >되며 사이에는 대문< 大門 >이 놓였다. 아래채는 거꾸로 앉았기 때문에 오히려 남쪽에 대나무등을 심어서 시설을 차단< 遮斷 >하고 북쪽에 아랫마당을 두었는데 그 앞에는 세로로 헛간채가 축조< 築造 >되었다. 안채는 원래 3간< 間 >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 推定 >하나 20세기 초에 사랑채를 지으면서 안채를 덧달아 증축< 增築 >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건물< 建物 >들은 모두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안채는 원래 전퇴 3간< 間 >집이었으나 덧달아내어 6간< 間 >ㄱ자형< 字形 >을 만들었다. 왼쪽에 부엌을 두고(아랫퇴는 역시 나중에 덧붙였음) 안방, 웃방 그리고 앞퇴의 툇마루가 되며 다음은 대청< 大廳 >, 맨 끝이 아랫방인데 머릿퇴에 역시 툇마루가 시설< 施設 >되었다. 꺾어져서 헛청이 마련되어 부엌이면서 헛간이 되고 아래채로의 통로가 된다. 뒷퇴에는 처마 밑에 덧기둥을 한줄 더 세워서 토방처럼 이용한데 구조< 構造 >를 보강< 補强 >한 것이기도 하다. 구조< 構造 >는 2고주4량, 곧 전면< 前面 >의 지붕이 후면< 後面 >보다 긴 민가식< 民家式 > 기법< 技法 >을 쓴다. 도리는 납도리이며 모를 죽인 정도이고 장혀는 쓰지 않았다. 퇴보는 무지개꼴로서 고주머리에 맞추어졌고 기둥은 네모이며 덤벙주초 위에 세웠다. 댓돌은 외벌대 장대석< 長臺石 >이며 지붕은 우진각 초가< 草家 >이다. 사랑채는 4간< 間 > 전퇴집으로서 머릿퇴를 두었다. 간살이는 서쪽에 대문간< 大門間 >을 배치< 配置 >하고 다음은 사랑부엌, 2간< 間 >사랑방으로 구성< 構成 >되며 사랑방의 앞퇴와 머릿퇴에는 마루가 놓였다. 사랑부엌 앞퇴도 마루가 깔렸는데 툇마루에서 이용하는 토광으로 쓰인다. 구조< 構造 >는 1고주5량이며 보의 단면은 둥근네모꼴로 대강 바심질을 했다. 대문간< 大門間 > 지붕틀은 등굽은 중도리(소꼬리보, 충량)를 가로로 걸쳐대고 그 등 위에 외기를 세로로 놓아 중간에 등굽은 중도리를 올리며 여기 등 위에 추녀 끝을 걸쳤는데 전형적< 典型的 >인 민가기법< 民家技法 >이다. 막돌 허튼층쌓기 댓돌이며 덤벙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우진각 초가지붕집이다. 안마당 서쪽은 단간< 單間 > 광채를 만들고 안채와의 사이는 뒷길로 나가는 편문< 便門 >을 시설< 施設 >했으며 사랑채와의 사이는 ㄱ자< 字 >로 담장을 두르고 장독등을 두는 공간< 空間 >으로 이용하고 있다. 아래채는 일자< 一字 > 6간< 間 > 전퇴집으로서 부엌+안방+웃방(앞툇마루)인 기본형에 2개의 광을 동쪽에 덧붙인 것이다. 여기에는 며느리가 거처하는데 같은 울안에 살면서도 살림은 따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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