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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사면석불 - 자연석 네면에 불상을 조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사방불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61

1983년 3월. 화전리(花田) 불당골 구릉위.
땅속에 묻혀있는 바위가 불상임이 확인되어 예산군에서는 이의 발굴조사를 공주박물관에 의뢰하게 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귀중한 백제사면석불이다.

납석계(蠟石系, 곱돌)의 자연괴석 기둥을 다듬어 불상을 조각하였다. 동서북면은 높이와 너비가 각각 거의 같은데 서쪽면만은 폭이 좁다.
전체높이 약 3m, 넓은 폭 110~120cm, 좁은 폭 50~60cm의 직육면체 기둥같은 형체로서 돌기둥은 원래 남북면이 넓고 동서면이 보다 좁은 것인 듯 현재 원모습대로 치석(治石)하여 남ㆍ북ㆍ동ㆍ서의 순차에 따라 너비가 좁아지고 있다.

가장 넓은 남면(南面)에는 좌상을 새기고 동ㆍ북ㆍ서면에는 입불(立佛)을 새겼는데 남면불이 이 돌기둥의 주불(主佛)로 생각되며 따라서 불전(佛展)의 주불로 남방불로 생각된다.

남면 남방불상(南方佛傷)은 현재 머리, 두손, 오른손 무릎부분등이 파손되었지만 발굴때 머리의 발견으로 원모습을 충분히 복원하여 볼 수 있다. 얼굴에 표현된 미묘한 묘사는 잘 알아볼 수 없도록 깨어졌지만 전체윤곽에서 듬직하고 박력있는 불력(佛力)을 느낄 수 있다. 체구는 두꺼운 불의(佛衣)속에 감싸여 있어서 가슴이나 배 등의 양감표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으며 전체적인 윤곽이 퍽 세련되어 당대의 뛰어난 걸작으로 생각된다.

비록 두손은 결실되었지만 손을 끼우던 구멍자리와 출토된 손모양으로 보아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었으리라 본다. 불의는 통견의로 오른쪽 어깨를 엎어내린 대의(大衣)의 한자락은 가슴을 거쳐 배아래로 내렸고 왼쪽 어깨를 덮어내린 대의 한자락은 거의 직선에 가깝게 흘러내려 다리를 거쳐 상현좌를 이루고 있다.
특히 직선적인 옷주름이나 평행계단식의 힘차고 강인한 주름선은 인도 굽타불상을 기원으로 하는 운강석굴불상에 유행되었던 고식을 따르고 있어서 퍽 주목된다.

특히 대의안에 비슷한 불의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상의(上衣)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배는 160cm나 되는 거대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두광(頭光)은 연꽃무늬, 빗살무늬, 당초무늬가 차례로 내려졌으며 이 주위를 불꽃무늬가 외곽으로 새겨져 있다.
서산마애불이나 연동리 석불상과도 친연성이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박진감나는 것이어서 보다 고식으로 평가된다.

동면 동방불상은 입상인데 남방좌불상보다 다소 소박 단순한 면도 보인다. 등신대(等身大)의 이 불상은 비교적 당당하고 세련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즉 넓은 가슴, 균형잡힌 어깨와 양감있는 팔, 자연스러우면서도 곧은 하체 등에서 이 불상의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미를 볼 수 있다. 통견의 불의는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게 처리되었지만 산뜻하고 우아한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광배는 8엽의 단관연화문을 새긴 두광만 있을 뿐 신광은 내만한 처리로 대신하고 있다.

북면 북방불상은 동방불상과 흡사하지만 노출되었던 부분도 있어서 원모습에서 어느 정도 변형되었으며

서면 서방불상은 전면 노출되어 마멸때문에 원모습을 상당히 잃어 버렸다.

이러한 사방불산의 특징은 중국의 공현석굴불상(鞏縣石掘 1ㆍ3ㆍ4窟, 517~528)과 친연성이 가장 강하고 용문양식(494~525)과 상통하며 백제의 서산마애불 등과 밀접한 관계다. (이의 조성은 빨라도 무왕-武王, 재위 600~640-대를 넘어서지 않으리라 보인다.)

따라서 백제작으로 자랑할 수 있는 작품중 가장 이른 것이며, 세련미에서는 서산마애불에 버금갈 만한 중요한 대작이라 하겠다.
이 불상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사방불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 조형의지상 의미심장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미술사상 가장 귀중한 작품의 하나로 생각된다.

이 사면석불은 1983년 3월에 발견, 7월 20일부터 8월 19일까지 발굴되었는데 발견당시 서쪽으로 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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