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47외
이 유적은 백제시대 사비성이었던 부여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백마강변 내동부락< 內洞部落 > 일원에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이 학계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87년 7월경 부여지방에 집중적으로 내린 호우로 가마의 천정일부< 天井一部 >가 노출되면서 비롯되었는데 '88, '90, '91년 3차에 걸친 국립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대규모의 백제시대(6세기후반 - 7세기전반) 와요지가 다양한 구조로 완형에 가깝도록 잘 남아있어 백제가마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유적의 중요한 특징을 보면 풍화암반층을 옆으로 파고들어가 구축한 지하식 평요< 平窯 >와 처음으로 등요< 登窯 >가 함께 발견되어 등< 登 > ·평요< 平窯 >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고, 발굴조사결과 드러난 10여개의 가마는 천장부분을 제외하고는 아궁이, 연소실< 燃燒室 >, 소성실< 燒成室 >, 연도< 煙道 >, 요< 窯 >앞 회구부< 灰丘部 >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가마의 전체형태와 구축방법은 물론 세부구조와 축조기술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화문와당과 상자형전돌 등의 출토유물을 통하여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사원지인 군수리 폐사지(사적 제 44호)와의 수급관계가 밝혀져 관요< 官窯 >생산체제이었음을 알수 있게 되었고, 정암리 가마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가마가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고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유적의 특성과 출토유물, 주변의 입지조건(백마강변)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서 제작된 제품들이 당시의 도성이었던 사비성(현 부여)을 비롯한 사찰등 건물조성에 주로 쓰여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고, 한편 이 유적 인근에는 백제시대(후기)의 고분 30여기와 산성(테메식)등 백제시대 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서 이 유적의 가치는 더욱 더 중요시 되고 있다.
이 유적은 백제시대 사비성이었던 부여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백마강변 내동부락< 內洞部落 > 일원에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이 학계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87년 7월경 부여지방에 집중적으로 내린 호우로 가마의 천정일부< 天井一部 >가 노출되면서 비롯되었는데 '88, '90, '91년 3차에 걸친 국립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대규모의 백제시대(6세기후반 - 7세기전반) 와요지가 다양한 구조로 완형에 가깝도록 잘 남아있어 백제가마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유적의 중요한 특징을 보면 풍화암반층을 옆으로 파고들어가 구축한 지하식 평요< 平窯 >와 처음으로 등요< 登窯 >가 함께 발견되어 등< 登 > ·평요< 平窯 >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고, 발굴조사결과 드러난 10여개의 가마는 천장부분을 제외하고는 아궁이, 연소실< 燃燒室 >, 소성실< 燒成室 >, 연도< 煙道 >, 요< 窯 >앞 회구부< 灰丘部 >가 완전하게 남아 있어 가마의 전체형태와 구축방법은 물론 세부구조와 축조기술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화문와당과 상자형전돌 등의 출토유물을 통하여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사원지인 군수리 폐사지(사적 제 44호)와의 수급관계가 밝혀져 관요< 官窯 >생산체제이었음을 알수 있게 되었고, 정암리 가마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가마가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고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유적의 특성과 출토유물, 주변의 입지조건(백마강변)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서 제작된 제품들이 당시의 도성이었던 사비성(현 부여)을 비롯한 사찰등 건물조성에 주로 쓰여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고, 한편 이 유적 인근에는 백제시대(후기)의 고분 30여기와 산성(테메식)등 백제시대 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서 이 유적의 가치는 더욱 더 중요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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