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536
충청< 忠淸 >·전라< 全羅 > 양도 백제< 百濟 >의 옛 영역에는 백제계< 百濟系 > 석탑이 몇 개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부여< 扶餘 > 정림사지석탑< 定林寺址石塔 >(국보< 國寶 > 제< 第 >9호< 號 >)의 양식을 조형< 祖型 >으로 삼고 있다. 이 탑도 그러한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기본 양식에서 정림사지탑< 定林寺址塔 >을 따르고 있다.
충청< 忠淸 >·전라< 全羅 > 양도 백제< 百濟 >의 옛 영역에는 백제계< 百濟系 > 석탑이 몇 개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부여< 扶餘 > 정림사지석탑< 定林寺址石塔 >(국보< 國寶 > 제< 第 >9호< 號 >)의 양식을 조형< 祖型 >으로 삼고 있다. 이 탑도 그러한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기본 양식에서 정림사지탑< 定林寺址塔 >을 따르고 있다.
이곳은 부여< 扶餘 >에서 멀지 않은 남쪽 백마강< 白馬江 > 건너에 있어, 지리적으로도 부여탑< 扶餘塔 >의 양식을 모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기단은 건축 기단이 아닌 거칠고 긴 판석< 板石 >으로 지대석< 地臺石 >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을 쌓은 위에 다시 1단을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게 해 놓았다.
기단 수법으로는 매우 엉성한 편이다. 탑신부는 옥신< 屋身 >과 옥개석< 屋蓋石 >을 각각 몇 장의 돌로 구성하였는데, 1층 옥신은 네 모서리의 모기둥을 딴 돌로 세우고, 그 사이에 긴 판석< 板石 >을 세웠다. 모기둥은 위가 좁고 밑이 없는 언터시스가 있으며 그 위에 1장의 판석< 板石 >을 얹고, 너비가 넓고 소로 < 小累 > 모양의 판석< 板石 >을 더 얹어서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2층과 3층도 같은 수법이지만 길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 들었을 뿐 아니라, 모기둥의 아래위 너비가 같아져서 엔터시스 수법이 없어졌다. 3층 옥신 북쪽 면에는 높이 18㎝, 너비 9㎝, 깊이 4.5㎝의 감형< 龕形 >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3층 옥신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둥 모양의 표시가 밑에까지 내려오지 않고 위쪽에만 표시되어 각 면의 표면이 요< 凹 >형을 이루고 있는 일인데, 이것은 하나의 퇴화한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각 층의 옥개석은 매우 얇고 넓어서 주목되는데, 추녀는 아래위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 轉角 >에서 아래위가 같이 반곡< 反曲 >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 落水面 >의 경사는 매우 완만한데, 2단의 탑신 굄이 마련되어 있다. 상륜부< 相輪部 >에는 노반< 露盤 > 같아 보이는 정4각형 돌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 탑은 탑신이 높은 데에 반하여 옥개석이 지나치게 넓어 안정감을 잃고 있다. 부여탑< 扶餘塔 >을 모방하였지만 조형감각이나 결구< 結構 >수법에서 훨씬 떨어지는 작품이다.
1931년에 1층 옥신에서 범문다라니경< 梵文陀羅尼經 > 조각·은합< 銀盒 >·목합< 木盒 >·상아불상< 象牙佛像 >·목제소탑< 木製小塔 >·수정옥< 水晶玉 >·은환< 銀環 > 등이 발견되었고, 1962년 8월의 해체 수리 때에는 2층 옥신 중앙에 둥근 사리공< 舍利孔 >이 있어, 금동제< 金銅製 > 외호< 外壺 >와 은제< 銀製 > 내호< 內壺 > 및 사리< 舍利 > 41알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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