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三國史記 >》 무왕조< 武王條 >에 "3월에 궁성< 宮城 >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 方丈仙山 >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 漢城時代 >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 熊津 >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 公山城 >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 王宮址 >로 추정되는 건물지< 建物址 >와 함께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 三神山 >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신산은 봉래산< 蓬萊山 >, 방장산< 方丈山 >, 영주산< 瀛州山 >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삼신산< 三神山 >에는 신선< 神仙 >과 불로초< 不老草 >가 있고, 황금< 黃金 >과 백은< 白銀 >으로 된 궁궐도 있는 일종의 이상향이다. 따라서 기록대로 이 궁남지의 한가운데에 방장선산< 方丈仙山 >을 모방한 조산< 造山 >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의 진·한대< 秦·漢代 >부터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삼신산을 조성하였던 것이 백제의 왕궁 조원< 造苑 >에 처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궁남지에 대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삼국사기< 三國史記 >》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 望海樓 >에서 군신< 群臣 >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다시 39년조< 年條 >에는 "3월에 왕이 왕궁< 王宮 >의 처첩< 妻妾 >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써 볼 때 이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 3만평 정도가 연못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크기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만이 확인될 수 있을 듯하다.
이 궁남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기록은 《삼국사기< 三國史記 >》 의자왕< 義慈王 >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 太子宮 >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 望海亭 >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다. 망해루< 望海樓 >나 망해정< 望海亭 >을 대지< 宮南池 >를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터이고,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 文武王代 >에 안압지< 雁鴨池 >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 三神島 >를 조성하며, 주변에 임해전< 臨海殿 >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 造苑 >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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