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0-1
원래 청마산성내 의열사에 봉안되었던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신위를 이곳에 옮겨 제사드리는 사당이다.
현재의 사당은 1957년에 건립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
원래 소형 건물로 된 상충사는 1981년 해체하여 충화면 팔층리로 옮겨 팔충사(八忠祠) 건립에 사용하였다.
삼충사의 터는 일제시대 신궁(神宮)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았던 곳이다.
성충은 의자왕때 좌평(佐平) 벼슬을 한 사람으로 왕의 실정을 간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 죽으면서 왕에게 글을 적어 올려 백제를 공격해 오면 육군은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그 험난한 지세를 의지하여 적을 막으라 하였다.
홍수는 의자왕때 좌평벼슬을 한 사람으로 지략이 뛰어났으나 귀양을 갔으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올 때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고 백강에서 당군을 막으라는 전략을 보냈으나 의자왕이 듣지 않았다.
계백은 백제말의 명장으로 660년 달솔(達率)의 직위로 백제를 구하고자 5천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에서 싸웠으나 신라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원래 청마산성내 의열사에 봉안되었던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신위를 이곳에 옮겨 제사드리는 사당이다.
현재의 사당은 1957년에 건립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
원래 소형 건물로 된 상충사는 1981년 해체하여 충화면 팔층리로 옮겨 팔충사(八忠祠) 건립에 사용하였다.
삼충사의 터는 일제시대 신궁(神宮)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았던 곳이다.
성충은 의자왕때 좌평(佐平) 벼슬을 한 사람으로 왕의 실정을 간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 죽으면서 왕에게 글을 적어 올려 백제를 공격해 오면 육군은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그 험난한 지세를 의지하여 적을 막으라 하였다.
홍수는 의자왕때 좌평벼슬을 한 사람으로 지략이 뛰어났으나 귀양을 갔으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올 때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고 백강에서 당군을 막으라는 전략을 보냈으나 의자왕이 듣지 않았다.
계백은 백제말의 명장으로 660년 달솔(達率)의 직위로 백제를 구하고자 5천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에서 싸웠으나 신라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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