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 산12
조선시대 중기의 충절인<忠節人> 황일호<黃一晧>(1588∼1641)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은 본관이 창원, 호는 지소<芝所>이며, 추포 황신<黃愼>의 양자이다. 어려서 황신과 조수륜<趙守倫>의 가르침을 받았고, 운봉현감<雲峰縣監>, 전주판관<全州判官>,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냈다. 이괄<李适>의 난·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때 공을 세웠고, 인조<仁祖> 16년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는데 청나라를 배척한다 하여 청나라 병사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정조<正祖> 21년(1797)에 세워진 것으로, 송환기<宋煥箕>의 추기<追記>에 의하면 원래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글씨는 황운조<黃運祚>가 썼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의 충절인<忠節人> 황일호<黃一晧>(1588∼1641)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은 본관이 창원, 호는 지소<芝所>이며, 추포 황신<黃愼>의 양자이다. 어려서 황신과 조수륜<趙守倫>의 가르침을 받았고, 운봉현감<雲峰縣監>, 전주판관<全州判官>,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냈다. 이괄<李适>의 난·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때 공을 세웠고, 인조<仁祖> 16년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는데 청나라를 배척한다 하여 청나라 병사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정조<正祖> 21년(1797)에 세워진 것으로, 송환기<宋煥箕>의 추기<追記>에 의하면 원래 글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글씨는 황운조<黃運祚>가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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