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정림사는 부여천도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었다. 백제 때의 번창을 알려주는 것이 석탑이라면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석불상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불상은 높은 대좌에 앉아 있는데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지만 마멸과 파손이 심하다.
불상은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은 전혀 알 수 없다.
머리에 얹은 둥근 갓은 후대의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 팔과 무릎 등은 완전히 없어졌다. 좁혀진 어깨와 가슴위로 올린 왼팔의 윤곽으로 보아 아마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일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대좌는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형식은 알아볼 수 있는데 불상보다 더 공들인 흔적이 보이고 2단의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하대 위 상단 윗부분에 복판복련(複瓣覆蓮)이 8잎 새겨져 있는데 대좌중에서 가장 양감이 두드러진 부분이다.
이 불상이 놓여 있는 곳은 강당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다.
중대의 8각간석(八角竿石)은 각면에 큼직한 안상이 표현되었으며, 하대는 3중으로 복련(覆蓮),안상을 새긴 각면이 중첩되어 복잡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과 대좌는 강당의 주존으로 생각되는데, 명문(銘文)기와로 보아 1025년경의 중창 때 조성된 불상으로 11세기 중엽의 만복사대좌나 불상과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양식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정림사는 부여천도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었다. 백제 때의 번창을 알려주는 것이 석탑이라면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석불상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불상은 높은 대좌에 앉아 있는데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었지만 마멸과 파손이 심하다.
불상은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은 전혀 알 수 없다.
머리에 얹은 둥근 갓은 후대의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 팔과 무릎 등은 완전히 없어졌다. 좁혀진 어깨와 가슴위로 올린 왼팔의 윤곽으로 보아 아마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일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대좌는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형식은 알아볼 수 있는데 불상보다 더 공들인 흔적이 보이고 2단의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하대 위 상단 윗부분에 복판복련(複瓣覆蓮)이 8잎 새겨져 있는데 대좌중에서 가장 양감이 두드러진 부분이다.
이 불상이 놓여 있는 곳은 강당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다.
중대의 8각간석(八角竿石)은 각면에 큼직한 안상이 표현되었으며, 하대는 3중으로 복련(覆蓮),안상을 새긴 각면이 중첩되어 복잡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과 대좌는 강당의 주존으로 생각되는데, 명문(銘文)기와로 보아 1025년경의 중창 때 조성된 불상으로 11세기 중엽의 만복사대좌나 불상과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양식을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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