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동충동 192-4
용성관은 통일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건립되어 조선시대에는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한때는 조선태조의 전패< 殿牌 >를 모시어 일명 휼민관< 恤民館 >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 휼민관은 정유재란을 맞아 남원성이 위태롭게 되자 병마사 이복남< 兵馬使 李福男 >은 본관을 그대로 두면 태조의 전패가 왜적에게 욕을 당할까 염려되어 소각하였다. 그후 광해군 12년(1620년)에 부사 최여립< 崔汝立 >이 휼민관을 재건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얼마 안되어 화재로 소실되고 남쪽의 중문< 中門 >만 남게 되었다. 그후 숙종 6년(1680년)에 부사 정동설< 鄭東卨 >이 재건에 착수하여 숙종 16년(1690년)에 부사 정협< 鄭峽 >이 대청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6.25때 폭격으로 또다시 전소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 용성관은 그 규모가 웅대하여 남원의 광한루< 廣寒樓 >, 관왕묘< 關王廟 >와 더불어 고대 건물의 3걸로 불리어 왔으나, 지금은 용성초등학교 본관 계단으로 사용되는 돌계단 1기와 용성관 기단 70여m만이 남아 있다. 당초에는 계단 1기만 지정되었으나, 1994. 7. 15 석물 29기를 추가로 지정하였다.
용성관은 통일신라 신문왕 11년(691년)에 건립되어 조선시대에는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한때는 조선태조의 전패< 殿牌 >를 모시어 일명 휼민관< 恤民館 >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 휼민관은 정유재란을 맞아 남원성이 위태롭게 되자 병마사 이복남< 兵馬使 李福男 >은 본관을 그대로 두면 태조의 전패가 왜적에게 욕을 당할까 염려되어 소각하였다. 그후 광해군 12년(1620년)에 부사 최여립< 崔汝立 >이 휼민관을 재건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얼마 안되어 화재로 소실되고 남쪽의 중문< 中門 >만 남게 되었다. 그후 숙종 6년(1680년)에 부사 정동설< 鄭東卨 >이 재건에 착수하여 숙종 16년(1690년)에 부사 정협< 鄭峽 >이 대청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6.25때 폭격으로 또다시 전소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 용성관은 그 규모가 웅대하여 남원의 광한루< 廣寒樓 >, 관왕묘< 關王廟 >와 더불어 고대 건물의 3걸로 불리어 왔으나, 지금은 용성초등학교 본관 계단으로 사용되는 돌계단 1기와 용성관 기단 70여m만이 남아 있다. 당초에는 계단 1기만 지정되었으나, 1994. 7. 15 석물 29기를 추가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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