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
이곳은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 학자< 學者 >이며 충신< 忠臣 >인 면암< 勉庵 > 최익현< 崔益鉉 >(1833∼1906)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은 순조< 純祖 > 33년(1833)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당시의 대학자 이항로< 李恒老 > 선생의 문하< 門下 >에 들어가 공부하여, 23세 때인 철종< 哲宗 > 6년(1855)에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吏曹正朗 >, 사헌부장령< 司憲府掌令 >, 승정원동부승지< 承政院同副承旨 >, 호조참판< 戶曹參判 > 등의 관직을 거쳤다. 고종< 高宗 > 10년(1873)에 대원군< 大院君 >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 上疏 >를 올려, 대원군이 물러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선생도 군부< 君父 >를 논박하였다 하여 제주도에 귀양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 江華島條約 > 체결 당시에 일본< 日本 >의 침략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강력히 척사론< 斥邪論 >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나라의 자주권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乙巳條約 >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해 6월, 74세의 고령< 高齡 >으로 제자 임병찬< 林炳讚 >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 義兵 >을 일으켜 일제< 日帝 >의 침략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쓰시마섬< 對馬島 >에 유배되었다. 이때 선생은 일본< 日本 >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단식 끝에 순국< 殉國 >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 重章 >에 수여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1907년 논산군 노성면의 국도변에 만들어졌다가 1910년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곳은 조선< 朝鮮 > 말기< 末期 > 학자< 學者 >이며 충신< 忠臣 >인 면암< 勉庵 > 최익현< 崔益鉉 >(1833∼1906)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은 순조< 純祖 > 33년(1833)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당시의 대학자 이항로< 李恒老 > 선생의 문하< 門下 >에 들어가 공부하여, 23세 때인 철종< 哲宗 > 6년(1855)에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吏曹正朗 >, 사헌부장령< 司憲府掌令 >, 승정원동부승지< 承政院同副承旨 >, 호조참판< 戶曹參判 > 등의 관직을 거쳤다. 고종< 高宗 > 10년(1873)에 대원군< 大院君 >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 上疏 >를 올려, 대원군이 물러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선생도 군부< 君父 >를 논박하였다 하여 제주도에 귀양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 江華島條約 > 체결 당시에 일본< 日本 >의 침략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강력히 척사론< 斥邪論 >을 주장하였으며, 이후 나라의 자주권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乙巳條約 >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해 6월, 74세의 고령< 高齡 >으로 제자 임병찬< 林炳讚 >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 義兵 >을 일으켜 일제< 日帝 >의 침략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쓰시마섬< 對馬島 >에 유배되었다. 이때 선생은 일본< 日本 >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하고 단식 끝에 순국< 殉國 >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 重章 >에 수여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1907년 논산군 노성면의 국도변에 만들어졌다가 1910년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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